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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동금(玉洞琴)’ 중요민속문화재 지정

노촌魯村 2014. 10. 21. 06:18

옥동금(玉洞琴)’ 중요민속문화재 지정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안산시 성호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옥동금(玉洞琴)’을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한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83호 ‘옥동금’은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년)의 셋째 형인 옥동 이서(玉洞 李漵, 1662~1723년)가 만들어 연주하던 거문고이다. 문고는 제작 시기와 사용자가 분명하여 18세기 초 우리 악기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유물이다.

 

‘옥동금 ’의 유래에 대해서는 조선 고종(1852~1919년) 때 홍문관교리와 영흥부사, 우승지 등을 지낸 수당 이남규(修堂 李南珪, 1855~1907년)의 문집인 『수당집(修堂集)』 권1 「군자금가(君子琴歌)」에 전한다. ?수당집?에 의하면, ‘옥동금’은 옥동 이서가 금강산 만폭동의 벼락 맞은 오동나무를 얻게 되어 이로 거문고를 만들고, 뒤판에 시를 지어 새겼으며, 당시에는 이를 ‘군자금(君子琴)’이라 불렀다고 한다.

※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조선 시대 홍문관에 둔 정오품 관직

※ 우승지(右承旨): 조선 시대 승정원의 정삼품 당상관의 관직이며, 왕명의 출납과 육조의 업무를 나누어 맡음

 

옛 사람들에게 악기(樂器)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땔감으로 쓸 나무도 귀했지만, 거문고와 같은 큰 형태의 악기를 제작하기 위한 나무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동금과 같은 거문고가 대를 물려서 전해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해지는 ‘옥동금’의 뒤판에는 소장자였던 옥동 이서의 친필을 집자(集字)한 ‘玉洞’이라는 글자와 효언 윤두서(孝彦 尹斗緖, 1668~1715년)의 아들인 낙서 윤덕희(駱西 尹德熙, 1685~1776년)가 쓴 시가 새겨져 있어 옛 거문고의 품격과 예술적 조형미를 한껏 높여주고 있다.

 

아울러 옥동금의 크기와 형태가 오늘날의 거문고와 다소 다르기 때문에 악기와 옛 음악을 복원하는 모델로서도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옥동금’은 여주이씨(驪州李氏) 문중에 전해지다가 지난 2011년 11월 12일 손 이효성(李曉成) 씨가 안산시에 기증하여 안산시 성호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소장자인 안산시와 협력하여 이번에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는 ‘옥동금’을 더욱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해 나갈 예정이다.

 

<글.사진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