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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

노촌魯村 2016. 5. 10. 07:47




신풍루(新豊樓)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이란 '국왕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으로 정조대왕의 수원사랑을 보여준다.


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사적  제478호.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원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성곽의 둘레는 약5.7이고 성벽의 높이는 4~6m 정도인데 다산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며, 현재는 화성행궁과 내포사가 복원되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장안문·팔달문·화서문·창룡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수원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수원시청 자료)











좌익문(左翊門)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으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道)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중양문(中陽門)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활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삼도(三道)




화성행궁의 정전 봉수당(奉壽堂)















나인처소












노래당(老來堂)

정조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수원에서 노후 생활을 꿈꾸며지는 건물이다.




낙남헌(洛南軒)

1795년 홍경궁 홍씨 회갑연 기간 중 과거 시험과 양로연 등의 여러 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득중정(得中亭)

정조대왕이 화성행궁 안에서 활을 쏘신 곳으로 모두 명중시켰다고하여 득중정이라 했다.

경룡관(景龍館)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누문 '경룡景龍'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으로 뜻한다.

장락당(長樂堂)

화상행궁의 침전으로 정조대왕이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빌며 직접 편액을 써서 걸었다.


복내당(福內堂)

화성행궁의 내당(內堂)으로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의 가족들이 거쳐하던 곳이다.


 



유여택(維與宅)

정조대왕이 행차 중 잠시 머물며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장남헌壯南軒 현판






비장청

서리청(書吏廳)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집사청(執事廳)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권 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집사청에 마루에 전시된 여러 복식











운한각의 정조 영정







남군영(南軍營). 북군영(北軍營)

신풍루 좌우에 위치해 있으며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아는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