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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문경

일 년 중 석가탄신일에만 문을 여는 문경 봉암사(聞慶 鳳巖寺)를 찾아서 ...

노촌魯村 2016. 5. 15. 06:19


일 년 중 석가탄신일에만 문을 여는 문경 봉암사를 찾아서 ...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 기슭에 자리한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5(서기 879)에 지증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지증대사가 심충이란 사람의 권유로 현봉암사 자리를 결정하고 그 자리에 있던 큰 못을 매몰하려 하는데 큰 용이 서식하고 있는지라 지증대사는 신통력으로 그 용을 구룡봉으로 좇고 매몰하여 그 자리에 봉암사를 세웠다고 한다. 백운대에 계암 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봉암사를 창건할 당시 날마다 그 바위위에서 닭 한마리가 새벽을 알렸다고 한다. 그 후 지증국사의 문손들이 국사의 뒤를 이어 중수하였는데 웅장하고 예술의 극치를 다한 건물이 즐비했다고 한다. 중창 80년 후에 극락전 한 동만 남기고 전소되고 말았다.

그 후 고려 초에 정진국사가 주석하게 되어 중창하여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극락전은 목탑형으로 건조된 건물로서 경순왕이 피난 때 원당으로 세운 유서 깊은 전각이라고 한다. 중간사적은 기록을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여러 번 증수를 거듭 하였다. 순종 원년에도 화재로 대웅전이 소실되었으며 195647일에도 큰 화재로 소실되었다. 봉암사는 신라 선문구산 중의 하나로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유서 깊은 사찰인 덕분으로 한때 폐사 위기에 까지 이르렀으나 이제는 증창을 거듭해 옛 모습을 되찾고 많은 수도승이 운집하여 수도에 전념하고 있다.

현재 대가람 증수 불사가 수삼 년째 계속되어 199264일에 대웅전이 완성되었다. 대웅전은 108평의 웅장한 건물이며 삼존불을 모시고 목각형 또한 뛰어난 솜씨의 수작으로 매우 장엄하다. 희양산 일대는 경관이 수려하여 고운 최치원선생의 유적이 여러 곳에 전한다. 또한 희양산문이라 하면 당나라에까지 그 실력과 수준이 인정된 선지식의 교단이라고 높이 평가 되었다고 한다.



봉암사 일주문





 

 



봉암사 대웅보전

금색전


금색전 비로자불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聞慶 鳳巖寺 三層石塔.보물  제169호.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90-2번지 봉암사)

봉암사에 자리잡고 있는 3층 석탑이다.
탑은 건물의 댓돌에 해당하는 기단부(基壇部), 탑의 중심이 되는 탑신부(塔身部),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은 기단이 2단이나, 현재 땅 위로 드러나 있는 이 탑의 기단은 1단이다. 특이한 것은 지면과 맞닿아 있어야 할 탑의 받침돌 밑면에 또 하나의 받침이 있어 혹시 이것이 아래층 기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넓어 보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머리장식 모두가 완전히 남아 있어서 한국 석탑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유례라는 점이다. 탑의 머리장식은 인도의 탑에서 유래했으며 인도탑의 소형화가 우리나라 탑의 머리에 적용되었다. 탑의 가장 윗부분에 놓이며 여러 개의 구성요소가 차례로 올려져 가장 장식적으로 마련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9세기 통일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기단 구조가 특이하고, 탑신의 각 층 비례와 균형이 적절하여 아름답다. (출처:문화재청)


이 탑은 봉암사 경내 금색전 앞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6.31m이다. 기단구조는 단층으로, 이 부근의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며 신라 하대의 변화상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국내에서는 보기드물게 상륜부가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어 주목되는 탑이다.
기단부에는 한 변 3.24m의 넓은 방형의 지대석을 깔았는데, 그  밑에는  곡선을 그리는 1단의 받침을 나타내어 갑석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갑석으로는 볼 수 없다. 그 상부에는 다시 높은 굄 형식의 하대석이 있어 기단의 중석을 받치고 있다. 중석을 4매석으로 우주와 탱주를 하나씩 모각 하였고, 갑석은 밑에 부연을 얇게 나타내었으며, 상면에는 호형과 각형의 굄 장식이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한 돌이며 옥신석에는 층마다 우주를  모각 하였다. 옥개석은 추녀 밑이 직선으로 되었고 낙수면은 전각에 이르면서 반전을 나타내었다. 옥개의 층급받침은 각 층이 모두 5단이다. 상륜부는 2단의 갑석을 나타낸 방형의 노반을 놓고 그 위에 편구형의 복발을 놓았다.
복발은 두 줄의 횡대 위에 네 개의 꽃잎을 양각한 형식이다. 복발 위의 앙화는 방형을 기본으로 하여 네 면과 네 모서리에 6엽 혹은 4엽의 연꽃을 배치하였으며, 그 위에 다섯 겹의 보륜을 꽂았다. 다시 그 위에는 팔각의 보개를 놓고 십자형의 수연과 함께 그 꼭대기에 용차와 보주를 배치하였다. 상륜부에는 철간이 관통하여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중 보개의 형태는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석조부도의 옥개와 흡사한 형태로서, 아래에는 1단의 받침이 있고 각 귀마다 연꽃이 조각된 귀꽃을 새겼다. 
탑의 높이는 6.31m이고 그 중 상륜부 높이는 2.38m이며, 지대석의 너비는 3.24m이다.
이 탑의 조성시기는 9세기로 추정된다. 정상을 배경으로 않아 있는 3층 석탑의 균형 잡힌 모습의 우아한 아름다움은 희양봉의 장중하고 힘찬 기상이 휘몰아쳐 내려오다가  삼층석탑에 이르면 마치 영웅의 기개도 단아한 우아함 앞에서는 그 수줍음을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용트림으로 뻗어오던 기개는 일순 탑 앞에서 주춤하며 부드럽게 순화 되어 부드러움과 굳셈의 절묘한 조화로 찹배객의 발길을 묶는다.(출처 :문경시청)



이 탑에서와 같이 석조 상륜이 완전한 예는 매우 드물고 귀한 것으로서 주목을 끈다.(금색전에 보관된 상륜부)


 

문경 봉암사 극락전(聞慶 鳳巖寺 極樂殿.보물  제1574호.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길 313 (원북리))

문경 봉암사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시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건물로 전하고, 현재 극락전 내부에는 어필각(御筆閣)이란 편액(扁額)이 걸려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 옥개보수가 있은 듯 망와에 소화16년(1941년)이란 기록이 남아 있다.
봉암사에서 극락전은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다. 그 형태나 위치로 보아 조선 중후기에 세워진 왕실 원당일 가능성이 높으며, 기단과 초석은 고려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높은 단층 몸체에 차양칸을 둘러 마치 중층건물 같은 외관을 구성했고, 몸체와 채양칸의 기둥열을 다르게 한 독특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독특한 외관과 건축수법 및 단청에서 조선 중·후기의 건축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출처 : 문화재청)


이 건물은 879년(헌강왕 5)에 지증국사(智證國師)가 창건한 봉암사의 극락전이다. 935년(태조18) 정진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임란을 거치면서 극락전과 일주문만 남기고 그 많던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중수공사가 있은 듯 망와에 소화(昭和) 16년(1941)이란 명문(銘文)이 남아있다.
기단은 탑과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상ㆍ하갑석은 면석으로 처리하였고 기단바닥은 장방형 판석을 깔았다. 그 위에 외진주12본과 내진주4본으로 중층목탑을 만들었다. 외진주를 기단 상대갑석 위에 3칸형식을 세워 초층지붕을 받게하고 사천주(四天柱)를 세워 정방형 불전을 만들었다. 전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배면벽에 기대어 작은 불단을 만들었다. 전면문은 주칸사이에 문설주를 세우고 3짝문을 내었다. 중앙의 문은 궁널을 끼운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고 좌우는 세살창을 다달았다. 따라서 정면에서 볼 때 4분합문으로 보이며 좌우측에는 폭이 넓은 세살문을 중앙에 넣고 졸대를 세운 판벽으로 처리하였다. 비록 단칸의 불전이지만 일반 불전과 마찬가지로 정면과 양측면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하층기둥 상부는 주두를 얹고 도리방향으로 주두하부를 건너 질러  첨차를 보내고 직각방향으로 뺄목을 교차시켜 이음부분의 허약함을 보강시켰고 하층추녀는 내진주가 고주인 관계로 기둥에 얹을 수 없어 내진주 밖으로 사압을 만들어 추녀 뒷뿌리를 받게 하였다. 2층은 다포작으로 주칸포는 2구씩 사면에 넣고 주심포는 모두 귀공포이다. 공포의 결구방식은 외2출목 내2출목으로 구성시키고 첨차는 취두형으로 하부는 원호를 그리게 하고 상부는 소로없이 수평으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살미는 앙서형으로 힘이 있으며 단부는 사절시키고 내부쪽으로는 취두형으로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내출목 상단에 장혀를 올리고 상벽을 구성한 후 외진으로 17개의 우물을 돌리고 중앙에 공포를 찾아 만든 감입천장으로 장식하여 궁전천정을 연상케하고 있다. 이러한 천정구성은 덕수궁(德壽宮) 중화전(中和殿),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 등에서 볼 수 있다.(출처 : 문경시청)










청련화 빛나고 백련화 활짝 피니

사색의 찬란한 빛이 전각을 비추도다.

몸에 맞는 보배 옷이 생각 따라 나타나고

소반 가득한 진미가 때에 맞게 생겨나네.

 

공중에선 밤낮으로 하늘꽃비 내려오고

귓가엔 수시로 설법가락 울렸어라

부처님 찬탄하시는 소리 진실로 간절하니

중생들 어찌하여 귀의하지 않으리.


백암 성총(栢庵 性聰) :1631~1700년, 남원이 고향,정토보서 등을 저술한 큰스님 



산신각

조사전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국보 제315호.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길 313, 봉암사 (원북리))

이 석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인 도헌국사(道憲國師) 곧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로서,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쌍봉(雙峰)-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국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하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1차 사료가 된다. 이 비는 당대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그가 비문을 지은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제47호)와 함께 4산비문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탑비로서, 그 학술적 가치가 일찍부터 높이 평가되어온 것이다. 이 비에는 탑비를 세운 연대가 밝혀져 있을뿐 아니라, 비문을 쓰고 각자(刻字)한 사람이 분황사의 승려 혜강(慧江)임이 밝혀져 있어서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저자 최치원은 여타 전기자료와는 달리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여섯 가지의 신이(神異)한 사실〔육이(六異)〕과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육시(六是)〕으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다.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 비문 중에 밝혀져 있고 비 건립의 후원자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이 비가 갖는 의의를 높여 준다. 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이 탑비는 고비(古碑)로, 지증대사의 전기자료적 가치는 물론이고,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선종사·서예사·한문학사 등 한국고대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갖는 탑비로 평가된다.(출처:문화재청)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보물  제137호.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길 313, 봉암사 (원북리) )

지증대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봉암사 대웅전 왼쪽에 서 있다. 지증대사(824∼882)는 이 절을 창건한 승려로, 17세에 승려가 되어 헌강왕 7년(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882년에 입적하였다. 왕은 ‘지증’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적조’라 하도록 하였다.
이 탑은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다.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이다. 밑 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를 도드라지게 조각하였으며, 윗단을 괴는 테두리 부분을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두툼하게 하였다. 윗단은 각 모서리 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조각을 세우고, 사이 사이에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다. 가릉빈가는 불교에서의 상상의 새로, 상반신은 사람 모습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이다. 가운데받침돌의 각 면에는 여러 형태의 조각을 새겨 넣었는데,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다. 윗받침돌은 윗면에 탑신을 괴기 위한 굄대를 두었으며, 모서리마다 작고 둥근 기둥 조각을 세워 입체감 있는 난간을 표현하였다.
탑신은 8각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고, 앞뒤 2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다. 그 양 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나머지 두 면에는 보살의 모습을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 역시 8각이며, 아래에는 서까래가 두 겹으로 표현되어 겹처마집을 보고 있는 듯하다. 처마는 살짝 들려 있으며, 낙수면의 각 모서리선은 굵직하고 끝에 꽃장식이 알맞게 돌출되어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연꽃받침 위로 머리장식이 차례로 얹혀 있다. 지붕돌의 일부분이 부서져 있으나 각 부분의 꾸밈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품격이 느껴진다.
이 탑은 전체적인 비례가 잘 어우러져 있으며, 지붕돌이 조금 넓어 보이기는 하지만 안정감이 있다. 탑 옆에는 탑비가 나란히 서 있어서 지증 대사의 생애와 행적을 알 수 있으며, 비문의 기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헌강왕 9년(883)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출처: 문화재청)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聞慶 鳳巖寺 靜眞大師塔碑.보물  제172호.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1-2번지 봉암사)

봉암사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전기의 탑비로 봉암사를 중흥한 정진대사의 것이다.
정진대사(878∼956)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로, 효공왕 4년(900) 당나라에 들어가 25년간 유학하고 경애왕 1년(924)에 돌아와 신라 경명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고려 태조 18년(935)에는 봉암사를 두번째로 크게 짓고, 불교의 중흥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 전기의 태조·혜종·정종을 선문(禪門)에 들게 한 장본인으로,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왕은 ‘정진’이라는 시호와 ‘원오’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리돌을 올린 모습으로, 거북의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이 두드러지게 커 보인다. 꼭대기에는 불꽃무늬에 휩싸인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또렷하게 조각되어 우뚝 솟아있다.
고려 광종 16년(965)에 세워진 비로,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화되었으며 조각 기법이 퇴화하였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이몽유가 짓고, 명필 장단열이 글씨를 썼다. (출처;문화재청)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聞慶 鳳巖寺 靜眞大師塔.보물  제171호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산1-1번지 봉암사)

봉암사에 있는 정진대사 긍양의 사리탑으로, 경내에서 벗어나 사찰 입구 북쪽 산중턱 가까이 자리하고 있어 경승지를 택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진대사(878∼956)는 통일신라 효공왕 원년(897)에 개초사에서 수도한 후, 효공왕 3년(899)에 당에 다녀왔다가 경애왕 원년(924)에 귀속하여, 백암사를 거쳐 봉암사에 와서 이 절을 크게 번영시켰다.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는 이 탑은 탑신(塔身)을 받치는 기단(基壇) 곳곳에 꽃무늬조각과 구름·용·연꽃무늬 등의 불교 세계를 상징하는 각종 장식을 화려하게 두었다. 탑신의 높직한 8각 몸돌은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조각이 있고, 앞쪽면에 자물쇠 모양의 조각이 있을 뿐, 다른 7면은 조각이 없다. 지붕돌은 지나치게 두꺼워 둔중한 느낌을 주며,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머리장식만이 남아 있다.
고려 광종 16년(965)에 세워진 탑으로, 양식상 절 안에 남아있는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을 모방하고 있으나 기본구성과 비례감, 조각수법 등이 다소 떨어진다. (출처:문화재청)


이 탑은 나말려초의 고승인 정진대사 긍양(兢讓, 878∼956)의 사리탑으로, 고려 초기인 956년과 965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5m이다. 현재 부도는 봉암사 경내에서 벗어나 사찰 입구 북쪽 산 중턱 가까운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지대석부터 옥개석ㆍ상륜부에 이르기까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한 팔각원당형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다.
지대석 상면에 낮은 각형, 높은 원호, 낮은 각형으로 마련된 3단 굄이 기단부를 받고 있는데, 기단은 통식대로 상대석ㆍ중대석ㆍ하대석으로 이루어졌다. 하대석은 2단으로, 높은 하단의 각 면에는 1구씩의 안상이 조각되고 그 안에는 화형(花形)이 장식되었다. 상단에는 부연이 있는 갑석이 덮여 있다. 상면에는 운문(雲文)이 조각된 굄대가 있어 그 위의 상단을 받고 있다. 상단 면석의 각 모서리에는 거의 원각에 가까운 원주형을 모각하고 그 표면에 운문을 장식하였다. 각 면에는 운문과 쌍룡문을 조각하였으며 상단에는 역시 8각의 갑석을 덮었다. 중대석은 팔각의 각 면에 안상 1구씩을 조각하였는데, 상하의 좌우에서 안으로 뻗은 화형이 강조된 특이한 형태이다.

안상 내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고, 앞면 1면에만 탁상의 사리합과 보개ㆍ보산ㆍ보주를 조각하였는데, 다른 7면에는 아무 조식(彫飾)이 없어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상대석은 하면에 2단의 받침이 각출되었으며, 그 위에 복엽으로 16판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었다. 이 상단에는 두툼한 갑석형 판석을 덮고, 그 상면에 높은 2단의 옥신굄대를 마련하였는데 상대갑석의 윗면에 3단의 낮은 굄을 조출하여 이를 받고 있다. 하단이나 상단 굄대의 각 모서리에는 난간을 돌리고 또한 각 면석에는 단주를 세웠는데, 하단은 1주씩이나 상단은 2주씩 배치하였다.
옥신석은 각 면에 우주가 모각되었으며, 앞면에는 문호형과 자물쇠가 조각되었으나 다른 7면은 우주뿐으로 기단부 중대석과 같이 조식이 생략되었다. 옥개석은 하면에 3단의 받침이 각출되어 있고 이어 각형의 부연이 가늘게 조각되었다. 옥개석의 각 모서리 전각부에 이르면서 상향과 반전이 심한데 전각에는 귀꽃의 조각이 없다. 낙수면은 정상에서 약간 급한 듯하나 차차 평박해졌으며 기왓골의 표시는 없고 굵직한 우동만이 표현되었다. 옥개석 정상부에는 각 우동부에 1판씩 8판의 복련을 돌리고 상륜부를 받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부재가 별로 남아 있지 않은데, 8판의 입상형 앙련(立狀形 仰蓮)이 화사하게 조식된 앙화석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보륜하나가 남아있다.
이 부도는 지증대사적조탑의 각부를 많이 모방하였는데, 같은 지역 내에 유존하는 앞시대 작품의 모든 양식과 수법을 따르는 일반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기본구성이나 조식에 있어서 지증대사적조탑에 비하여 간략화의 경향이 보일 뿐만 아니라, 각부 비례에 있어서도 높이에 비하여 너비가 좁아 고준한 느낌을 주며, 두꺼운 옥개는 둔중한 감을 주고있어 시대적인 변화를 볼 수 있다(출처 : 문경시청)






 

봉암사마애보살좌상(鳳巖寺磨崖菩薩坐像.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산54-1번지)

경상북도 문경의 봉암사(鳳巖寺) 근처에 있는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절벽의 거대한 바위면이나 돌에 선이나 돋을새김 기법 등으로 조각한 불상을 말한다. 이 불상은 머리 주위의 바위면을 얕게 파서 불상이 들어 앉을 자리를 만들어 머리 부분만 돌출시키고 몸체는 가는 선으로 새겼다. 신체에는 속옷에 매어진 띠매듭이 매우 뚜렷하고, 옷주름은 자연스럽게 밑으로 흘러내렸다. 왼손은 배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 대좌(臺座)에 앉아 있는 자세로 무릎이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탄력과 힘이 감소되고 형식화되어 가는 고려말 조선초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출처:문화재청)


이 보살상은, 봉암사(鳳巖寺) 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백운대(白雲臺)라고 불리는 경관 좋은 곳에 다다르는데. 이 곳 개울가에서 동북을 향한 높이 4m, 폭4.4m의 큰바위면에 조각되어 있다. 마애보살좌상으로 머리 부분 주위를 약간 길게 파서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광배(光背)를 겸하는 동시에 머리 부분을 두드러지게 조각하였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오면서 앉은 상태나 하체는 거의 선각(線刻)으로 얇게 처리되어 있다. 보관(寶冠)의 중앙에 화문(花文)이 있고, 미간(眉間)의 백호(白毫)가 뚜렷하고, 반월형 눈썹 아래 반안(半眼)을 하고 있다. 코는 끝이 손상된것을 후에 보수하였고, 입은 아주 얇고 작게 만들어졌다. 둥근 얼굴에 어깨바로위까지 내려오는 긴 귀를 가졌으며, 턱은 좁다랗게 내려오는 것이 마치 주걱턱과 같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 되어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인데 선각으로 처리되었으며,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뚜렷하고 옷주름선은 유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무릎의 의습(衣褶)은 복선(複線)으로 장식성을 가하였으며, 가슴에는 군의 매듭이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다.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가슴에 얹어 두 손으로 연꽃을 들고 있다. 손 밑에 드러난 발은 두 손과 더불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오른발이 위로 올라가게 결가부좌(結跏趺座)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하체를 높게 처리하면서도 무릎사이를 넓게 하여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 대좌는 연화좌이나 마멸이 심하여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이 불상과 관련하여 희산구법(曦山舊法)에 백운대미륵비명(白雲臺彌勒碑銘)이 실려 있는데, 거기서는 이 「석면미륵상(石面彌勒像)」이 환적의천선사(幻寂義天禪師)의 원불(願佛)이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존명(尊名)이 미륵(彌勒)으로 정해질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탄력과 힘이 감소되고 형식화되어 고려 말기 또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경시청)

 

 



 

봉암사마애보살좌상 앞 반석石을 돌로 바닥을 두드리면 면 목탁 소리가 난다.

문경 봉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聞慶 鳳巖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보물  제1748호.경상북도 문경시 옥천길 59-6 (가은읍))

봉암사 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 51.5㎝로 비교적 크기가 작은 편인데,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을 통해 1586년(선조 19)에 나운(蘿雲)과 법정(法正), 두 화원에 의해 조성된 불상임을 알 수 있어 임진왜란 직전 16세기 후반의 불교조각과 조각승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머리에는 크고 날카롭게 뻗친 나발을 부착하였으며, 나발 사이에는 큼직한 반달형의 중앙계주와 둥근형태의 정상계주를 나타내었다. 얼굴은 둥글고 통통하게 살이 잡혀 복스럽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여준다. 어깨는 좁아 다소 왜소한 느낌이 드는 불신에는 불의를 이중으로 입었으며, 부드럽고 간결한 선으로 주름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제주 서산사 목조보살좌상(1534년)이나 경주 왕룡원 소조약사여래좌상(1579년)등 16세기에 조성된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봉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현존 작품이 많지 않은 16세기 후반의 기년 불상으로서 조성을 담당했던 나운(蘿雲)비구, 법정(法正)비구의 이름을 전하고 있으며, 조성 배경으로 공회빈 윤씨(덕빈 윤씨)와 같은 왕실의 인물을 추정할 수 있는 점 등 조선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인증사진 한 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