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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상주

상주 천주교 신앙고백비(尙州 天主敎 信仰告白碑)

노촌魯村 2017. 2. 3. 21:29




상주 천주교 신앙고백비(尙州 天主敎 信仰告白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62호.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삼괴리 361)

 이 비는 자연석 기단위에 세워진 높이 127㎝, 너비 40㎝, 두께 22㎝크기의 비석이다. 김삼록(金三祿, 1843~1935)은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공격이 강하던 병인박해(1860~70년대)때, 박해를 피해 유랑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 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비의 모양새나 성격이 매우 독특할 뿐만 아니라 천주교가 상주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신앙심을 강하게 만들어 가던 한 인물의 행위를 잘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이다. 당시 청리 삼괴, 공성 등에 여러 천주교 신자들이 사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출처 : 상주시청)






박해를 피해 도피생활 하던 김삼록 도미니코
신앙고백비가 서있는 상주시 청리면 삼괴 2리 마을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김씨 집안 김복운의 아들 4형제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왔다고 전해진다. 그 중 차남인 삼록 도미니코의 신앙심이 유난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른 형제들은 박해에 못 이겨 배교했지만 김삼록 도미니코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이곳저곳으로 도피생활을 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공식적인 박해가 끝났으나 그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산골짜기에 숨어사는 농부 삼록에게는 박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도미니코는 오매불망 천주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지 못한 채 숨겨야하는 자신의 신앙심을 참을 수 없어 단단한 바위에 새겨 신앙고백비를 만들었다.(1894~1900년 추정) 자신과 집안문중이 살고 있는 석단산 아래 높이 127cm 폭 39cm 두께 22cm의 화강암에 전통적인 직사각형 비석 몸체와 십자형을 하나의 돌에 깎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갓을 얹어 신앙고백비를 건립한 것이다. 
상단의 십자형 돌에 천주라는 글이 새겨놓고 그 아래 비석 부분에는 1: 천주님 2: 교황님 3: 주교님  4: 신부님 5: 신자들을 위한 기도문이 새겨져 있다. 
현장감을 위해서 한자와 풀이한 한글을 옮겨보았다. 
 
비문과 해제 
天主聖敎會 聖號十字嘉(架) 천주성교회 성호십자가 
第一: 天主恐衛咸              첫째는 천주님을 두려움으로 모신다. 
第二: 敎化皇衛咸              둘째는 교황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三: 主敎衛咸                 셋째는 주교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四: 神夫衛咸(父)            넷째는 신부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五: 敎于衛咸(友)            다섯 째는 교우들을 받들어 모신다. 
奉敎人 金道明告                천주교인 김도명고(도미니코) 바침 
癸卯生本(古) 盆城(今.金海)
계묘년(1843)에 출생 본관은 분성(김해)김씨다. 
 
언뜻 보면 그 당시 언어표기에 문제점이 보이나 생각하고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자로 표기할 수 있는 우리말은 한자로 한자로 표기가 안 되는 우리말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자의 음만 따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神夫衛咸(신부 衛함. 아비(父)대신에 지아비(夫)를 사용한 것과 위(爲)한다는 의미의 한자를 소리 위(衛)로 차용한 점은 당시 한자에 능하지 않았을 한 농부가 최선을 다한 표기로 이해의 미소가 저절로 나온다. 또 자신의 세례명인 도미니코를 도명고로 새기고 천주님은 물론이지만 교황님과 주교님 신부님에 심지어 신자들까지 받들어 모시자는 그 큰 신앙은 감동 그 자체였다. 
한국천주교회사 유일의 신앙고백비
큰 돌을 운반하고 세우고 글을 새기는 과정에서 삼록은 쌀 다섯 가마 분의 금액을 부담하고 마을에 사는 이갈방 노인과 몇몇 신자들의 도움으로 나머지 비용을 댔다. 그리고 삼록은 그 고백비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까 봐 고백비 앞에 포플러나무 미루나무들을 많이 심어 사람들의 이목을 가렸다.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말하지 못해 애가 타는 천주님 사랑을 그렇게 숨겨서라도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신앙고백비가 교회사적으로 공식화 된 것은 1980년대. 1945년 해방 후 손자인 김순경(당시 79세)이 나무들을 베어내어 땅을 넓히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이후 상주 서문동성당 이성길 신부가 김순경의 둘째 아들을 만나 사실을 듣고 교회에 알렸고 2년 뒤 1984년 서울대교구 오기선 신부의 답사와 함께 신앙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졌다. 그 후 안동교구와 남성동성당을 중심으로 주변부지 매입 후 성역화가 이루어지고 대형 십자가와 14처 2000년 대희년 상징 조형물이 설치되었으며 2009년 12월22일 경상북도 지정 문화재 562호로 지정되었다. 
산 속 깊은 곳에서 외롭게 어렵게 자신의 신앙을 돌에 새긴 김삼록 도미니코 형제의 바위 같은 믿음은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 한다’는 성경말씀처럼 한국천주교회사에 발견된 유일한 신앙고백비로 남아 우리의 뜨뜻미지근한 신앙의 자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출처: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02월호.신앙의 땅_ 안동교구 상주 천주교 신앙고백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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