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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정사(舊·왕룡사원.경북 경주시 강동면 국당길 283)

노촌魯村 2017. 2. 19. 19:20

기원정사(舊·왕룡사원.경북 경주시 강동면 국당길 283) 무량수전

기원정사(·왕룡사원) 무량수전 사존불

경주왕룡사원목조아미타여래좌상(慶州 王龍寺院 木造阿彌陀如來坐像.보물  제1615호.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국당길 283, 왕룡사원)

이 불상은 복장에서 발견된 「환성사미타삼존조성결원문(還城寺彌陁三尊造成結願文)」을 통해 1466년에 조성역사를 시작하여 1474년에 비로소 완성되었으며, 불상의 조성발원에는 왕실종친부 및 지방관료·양반·양민 등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고, 불상의 제작은 양수(良手) 대선사(大禪師) 성료(性了)와 부양수(副良手) 선사(禪師) 혜정(惠正)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무릎이 넓고 둔중한 것에 반해, 어깨는 상대적으로 좁고 허리는 길어져 전반적으로 늘씬한 비례를 보여준다. 특히 머리 폭이 좁고 끝이 뾰족한 팽이형의 머리와 고려후기 불상에 비해 양감이 줄어든 수척한 얼굴, 좁게 연 가슴, 왼쪽 어깨 부근의 칼날형태로 접은 주름, 왼쪽으로 치우쳐 표현된 Ω형 주름 등은 1458년에 조성된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28호)의 양식계를 잇고 있고, 양쪽 무릎 앞에서 표현된 예리한 각을 이루며 활처럼 휘어진 주름과 무릎 위쪽에 형성된 돌출주름 등은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 등 조선전기에 제작된 불상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주름 표현이다.
이 불상은 「조성결원문」을 통해 불상의 제작연대는 물론 조성·봉안장 소, 그리고 조각승을 비롯한 조성주체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조선 초기 불상의 기준자료이며, 특히 이 불상은 전통불상의 토대 하에 조선 초 새롭게 유입된 외래양식을 적절하게 수용하여 만든 불상계통으로 모든 면에서 국보 제228호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비교되는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며, 확실한 제작연대를 가진 조선초기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로 조선초기 조각양식의 성립과 흐름을 이해하는 데 더없이 좋은 자료이다.(출처:문화재청)

높이 77㎝로 등신대의 불상인데 얼굴이 갸름하고 신체가 세장한 조선 초기 불상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머리의 육계와 정상계주는 뾰족하고 긴 편이며 계란형의 얼굴은 단아하고 코와 입 등이 단정하다. 상체는 세장하면서도 단정하며 결가부좌한 하체는 상체에 비해서 다소 큼직한 편이다.

왕장군용왕전(王將軍龍王殿)

목조문무인상(木造文武人像.시도민속자료 제73호 (경주시).경북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149-1)

조선시대(朝鮮時代) 후기작품(後期作品)으로 보이는 이 문무인상은 홰나무 재질(材質)로 되어 있다. 두 개의 상은 모두 통나무에 왼쪽 손만 노출시켰고 오른쪽 손은 의복 문양(紋樣) 속에 감추어진 상태를 취하였다. 문인상은 턱수염을 잡은 모습에 큰 관모(冠帽)를 썼다. 무인상은 투구를 쓰고 왼쪽 손은 지물(持物)을 지닌 모습이나 현재는 결실되어 있다. 투구 위에는 삼지창(三枝槍)을 꽂고 있다. 이 문무인상은 모두 이등신대(二等身大)의 특이한 형식으로 되어 있는 바, 이것은 이 지방의 용신신앙(龍神信仰)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하며, 약 200여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것은 이곳의 지형(地形)과 토속적(土俗的)인 민간신앙(民間信仰)에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한 목제조상(木製造像)이다. (문화재청 자료)
국당리 지명 유래 : 옛날 이곳에 신당이 있었다 하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마을에서 국화재배가 잘 된다고 하여 국당리라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형산(兄山)과 제산(弟山)의 전설

형산강은 형산兄山과 제산弟山 사이로 흘러 포항의 영일만으로 들어간다.

옛날, 형제산兄弟山이 형산兄山과 제산弟山으로 갈라지기 전에는 남천, 북천,기계천의 물이 안강일대에 모여 호수를 형성하였고, 범람하면 경주까지 그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안강의 치수문제는 신라의 숙원사업 이었다. 그리고 경순왕 김부가 왕위에 올랐을때에는 후삼국이 일어나 서로 각축을 벌였을 뿐만아니라, 나라 안에서는 사방에서 도적떼가 일어나 치안이 극도로 문란해지는 등 신라는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형제산兄弟山을 둘로 잘라 안강호수의 물을 어용사 즉 영일만으로 흘러 보내면 임정현땅의 지정왕기가 제압되어 역적이 출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경순왕은 태자 김충과 의논하여 백일간의 기도를 올리기로 하였다.

경순왕은 하늘에 올라가 목침으로 삼층집을 짓고 옥황상제와 천지신명과 신라왕실의 조종들에게 종묘사직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땅에서는 태자 김충이 형제산맥 단절을 천지신명께 기도하였다, 태자는 기도 끝에 큰 뱀이 되었다. 이 뱀은 사람들이 그를 용으로 불러 줘야만 용이 될 수가 있으므로 길가에 누워 지나가는 사람들이 용으로 불러주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아무도 용이라 불러주는 사람은 없고, 큰 뱀을 보고는 두려워서 달아나기만 하였다.

왕과 약속한 백일이 불과 하루밖에 남지 않은 날이었다. 크게 낙심을 하고있는데 마침 안강에 사는 한 노인이 유금이라는 이름을 가진 손자를 업고 지나다가 큰뱀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저런 큰 뱀도 이 세상에 있는가?"하고 말했다. 그때 업혀 있던 손자가 "할머니! 저것은 뱀이 아니고 용이에요"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뱀에서 용으로 변한 태자는 꼬리로 형제산을 내리쳐니 형제산兄弟山형산兄山제산弟山으로 갈라지고 그 틈으로 안강호수의 물과 경주에서 내려오는 물이 강을 이루어 영일만으로 흘러들어가니 지금의 형산강이다

뱀을 용으로 불러 준 아이에게 안강호수에 물이 빠진후 생긴 땅과 그 일대의 논밭을 주고 들의 이름은 아이의 이름을 따라 유금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강동면의 유금이라는 지명은 여기서 비롯 되었다.

형산兄山 산정의 기원정사(舊왕룡사원)라는 절에는 김부대왕과 김충태자의 목상을 세워 재향을 하고 그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왕장군용왕전(王將軍龍王殿) 내 칠성탱화

왕장군용왕전(王將軍龍王殿) 뒤 야외에 있는 탱화

산령각

관세음보살상

기원정사(舊·왕룡사원) 관세음보살상에서 본 포항시와 영일만

영일만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달만곶과 남구 호미곶면 호미곶과의 사이에 있는 만으로 형산강지구대의 북동단에 있으며, 동해남부선과 영양 - 울산, 부산 - 울진을 잇는 국도가 지난다. 포항항에서 울릉도를 잇는 여객선이 매일 운항되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아호·근호지변 이라 하고, 고려 때는 어룡담·어룡호·용담만 등으로 불렸으나, 일제강점기에 영일만이라 개칭되었다

영일만의 주요도시인 포항시는 한때는 고래잡이와 양식업이 성행했던 수산도시였으나 1967년 영일만으로 흘러들어가는 형산강 하구 일대가 종합제철공업지역으로 설정됨에 따라 본격적인 동남해안공업벨트 지역의 거점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연간 900t이었으나 지금은 연간 1200t의 제철 능력을 갖춘 중공업지대로 성장하게 되었다. 영일만 동쪽에 자리 잡은 포항공업기지는 270만평으로 제2제철소인 광양제철소에 이어 세계 2위의 종합제철소이다.

 

형산兄山의 정상頂上에 있는 기원정사(·왕룡사원)까지 승용차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한번 답사 권합니다.(클릭하면 원본보기 사진이 새창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