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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이거사지(移車寺址)

노촌魯村 2018. 7. 7.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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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는 이거사(경주시 도지동에 있는 신라 시대 절터로, 성덕왕릉의 원찰願刹)로 알려져 있음) 남쪽에 성덕왕릉(신라의 국력이 최고조에 올랐던 시대)이 있다고 했다. 실제 이거사지 남쪽 직선 거리 약 970m 지점에서 성덕왕릉이 확인되면서 삼국사기의 기록과 현장이 일치하고 있다.

* 왕이 돌아가니 諡(시)를 聖德(성덕)이라 하고 移車寺(이거사) 남쪽(佛國寺驛(불국사역) 西北(서북) 약 10町(정)에 장사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제8 성덕왕)

 

옛날 성덕대왕이 행차할 때 이곳에서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대기실’ 즉 ‘쉬고 기다리는 마을’이라는 전설이 있다 한다.

 

이거사지(移車寺址)의 폐탑

염불사지 동탑이 1963년에 불국사역 광장으로 이전하여, 다시 원래의 자리로 이전 하기 위하여 2008년 1월 24일 해체 될 때 까지의 모습(일층 옥개석은 도지동 이거사지의 폐탑재 임)

 

염불사지의 동탑(현재의 일층 옥개석은 새로 제작한 것임)

염불사지

도지동 이거사지 석탑 부재(염불사지 동탑이 불국사 역 광장에 있을 때 일층 옥개석으로 사용하였음. 원래 위치인 도지동 이거사지移車寺址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산동 염불사지에 있음)

 

앞쪽 옥개석이 이거사지移車寺址 일층옥개석이고 뒤쪽 옥개석이 염불사지 동탑의 일층 옥개석이다.

염불사지 동탑의 일층 옥개석(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하여 옥개석을 쪼갠 듯...)

 

이거사지 흩어진 탑재의 동편 150여미터 산속에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로자나불상이 작은 시멘트 건물 속에 있다.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慶州 方形臺座 石造如來坐像.보물 제1977호. 청와대)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慶州 方形臺座 石造如來坐像)1913년 즈음 경주에서 반출(경주 이거사지에서 반출되었다는 설이 있음)되어 당시 서울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있는 총독 관저에 놓였다가 1939년 총독 관저가 경무대(청와대 이전 명칭)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물 지정검토를 하면서 시행한 과학조사에서 석조여래좌상의 석재가 남산과 경주 이거사지(移車寺址) 등에 분포한 경주지역 암질로 구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다만, 현재까지 밝혀진 문헌과 과학조사 결과로는 석조여래좌상의 원위치를 확인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출처:문화재청)

* 왜성대(倭城臺):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주둔한 데서 유래한 마을로 현재 남산에는 터만 있음

* 경주 이거사지(移車寺址): 경주시 도지동에 있는 신라 시대 절터로, 성덕왕릉의 원찰(願刹)로 알려져 있음

 

2022.5.23 영남일보에서 캡쳐

 경주 성덕왕릉(慶州 聖德王陵)

경주 성덕왕릉(慶州 聖德王陵.사적 제28호.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8)

경주에서 불국사 방향으로 가는 길의 동남쪽 구릉 소나무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1∼737)의 무덤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이다.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이 능은 밑둘레 46m 높이5m이다. 무덤 아래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는데, 높이 90㎝ 정도의 돌(면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조각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있고 무덤 주위의 4모서리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석상 앞쪽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 각 1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무인석 1개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石人) 1개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에서 보이고 있는 석물의 사실적인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며,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성덕왕릉귀부(聖德王陵龜趺.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6호.경북 경주시 조양동 666)  

통일신라 성덕왕(재위 702∼737)의 능 앞에 세웠던 비석의 받침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비는 원래는 비몸과 그 위에 머릿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이 받침돌만 남아 있다. 받침의 거북은 목이 부러졌으며, 앞·뒷발에는 발톱을 새겨 놓았다. 등에는 6각형 무늬를 새겼으며, 중앙에 비몸을 꽂았던 네모난 홈이 파여 있다. 거북의 등에 새긴 무늬나 다른 덩굴무늬를 통해 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비록 비몸과 머릿돌이 없어졌으나 왕릉을 만들 때 이용된 거북받침돌의 제작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문화재청 자료) 

 

경주 효소왕릉(慶州 孝昭王陵.사적 제184호.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8) 

신라 제32대 효소왕(재위 692∼702) 무덤이다. 신문왕(재위 681∼692)의 아들로서 삼국을 통일한 후 안정과 발전이 있던 시기에 왕위에 올라 서시전과 남시전 등 시장을 열어 물품의 유통을 쉽게 하였다. 높이 4.3m, 지름 10.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석을 돌렸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있다. 무덤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혼령이 머무는 자리라는 혼유석만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02년에 왕이 죽자 이름을 효소라 하고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했으나, 현재 서쪽에 있는 이 무덤은 망덕사터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약 8㎞ 거리에 있어 차이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망덕사터 동쪽에 있는 신문왕릉을 효소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문화재청 자료)

 

조선고적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