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상북도/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노촌魯村 2019. 10. 14. 14:47


   

도남서원(道南書院 : 경상북도 상주시 도남동 175)

낙동강 무임포(無任浦)에 위치한 도남서원은 1606년 창건되어 1676년 사액되었으며, 1797년 동․서재를 세웠다. 이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쳤으나, 1871년에 훼철되었다. 1992년 향토 유림에서 복원에 착수하여, 강당 등을 일부 복원하였으며 2002년에 유교문화권 정비사업으로 정허루(靜虛樓) 등이 복원되었다. 묘우의 이름은 도정사(道正祠), 강당은 일관당(一貫堂), 루는 정허루(靜虛樓), 외삼문은 입덕문(入德門), 동재는 손학재(遜學齋), 서재는 민구재(敏求齋), 요사채는 사행당(四行堂)이다.
도남(道南)이란, 정호(程顥)가 제자 양시(楊時)를 고향으로 보낼 때, ‘우리의 도(道)가 장차 남방(南方)에서 행해지리라(吾道將行於南方)’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조선의 유학 전통은 바로 영남에 있다는 자부심에서 이 서원은 탄생하였다.
포은 정몽주,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호재 이언적, 퇴계 이황, 소재 노수신, 서애 류성룡,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등 총 9현이 봉안되어 있다.

․ 정몽주(鄭夢周, 1337년-1392년)
처음 이름이 몽룡, 몽랑 자는 달가, 호는 포은, 본관은 연일, 운관의 아들이며 영천 출신이다. 1360년 문과에 급제하고 1380년 이 성계와 함께 왜구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1390년 수문하시중 1392년 개성 선죽교에서 방원의 문객 조 영규에게 격살당했다.
유학의 성리학에 뛰어났고 고려의 충신이기도 하다. 개성에 오부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을 진흥시켰으며 중종 때에 공자를 모시는 사당 문묘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충이다.

·김굉필(金宏弼, 1454년-1504년)
자는 대유, 호는 한훤당 사옹, 본관은 서흥, 유의 아들이다. 한양 출신이고 김종직이 문인이며 형조좌랑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 일파로 몰려 희천에 유배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았다. 성리학자요 그림에도 능했는데 문인에 조광조, 이장곤, 김안국 등이 있으며 광해군 때에 문묘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경이다.

·정여창(鄭汝昌,1450년-1504년)
자를 백욱이라 하고 호를 일두라 했으며 본관은 하동이다. 육을의 아들, 함양 출신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며 1490년 문과에 올랐고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에 유배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역행실천 위주의 성리학자였다.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헌이다.

·이언적( 李彦迪, 1491년-1553년)
자를 복고 호를 회재 자계응이라 했으며 본관은 여주이다. 번의 아들이고 처음 이름은 적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자를 더했다. 1514년 문과에 올랐으며 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다. 위사 공신 3등이며 1547년 윤 원형에 의해 강계에 유배되었고 배소에서 죽었다. 퇴계 사상에 많은 영향을 준 성리학자이다. 시호는 문원이다.


·이황(李滉, 1501년-1570년)
자는 경호, 호는 퇴계 도옹, 퇴도, 청량산인이라 하였으며 처음 이름은 서홍이다. 본관은 진보며 식의 아들, 예안 출신이며 1534년 문과에 올랐고 양관 대재학을 지내고 성리학자이며 시호는 문순이다.

·노수신(盧守愼, 1515년-1590년)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穌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숭(嵩)의 후손이다. 시호는 문의(文懿) ·문간(文簡). 1531년(중종 26) 이연경(李延慶)의 사위로 문하생이 되고,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1544년 시강원(侍講院) 사서가 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문장과 서예에 능하였고,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여 주자학파(朱子學派)의 공격을 받았으며, 휴정(休靜) ·선수(善脩) 등과도 교제하여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문집에 《소재집》이 있다.

·류성룡 (柳成龍,1542년-1607년)
자는 이현, 호는 서애 본관은 풍산이다. 중영의 아들이고 이황의 문하인이다. 1566년 문과에 올랐으며 양관대제학 영의정에 올랐다. 이순신, 권률 등 명장을 천거하여 임진란에 큰공을 세우게 했다.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도체찰사로 군무총괄, 화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 군대 양성, 훈련 도감을 설치했다. 기효신서, 강해 등 국방에 대비했고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기도 했다. 도학, 문장, 글씨에 이름 떨쳤다.

·정경세(鄭經世, 1563년-1633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아버지는 좌찬성여관(汝寬)이며, 어머니는 합천 이씨(陜川李氏)로 가(軻)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578년(선조 11)경상도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의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582년회시(會試)에서 진사에 뽑히고, 1586년알성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588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가 곧 통사랑대교로 승진되었다. 이후 대사헌·승정원도승지·의정부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공정한 도리를 확장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士論)을 조정하여 국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경전에 밝았으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는 『우복집』·『상례참고(喪禮參考)』가 있다.

·이준(李埈 , 1560년-1635년)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호는 문간(文簡)이다. 조년(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탁(琢)이고, 아버지는 수인(守仁)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91년(선조 2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했으나 습격을 받아 패하였다.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 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자료출처 : 상주시청)


정허루(靜虛樓)


사행당(四行堂)

동재는 손학재(遜學齋), 서재는 민구재(敏求齋),

동재는 손학재(遜學齋)

서재는 민구재(敏求齋)

강당은 일관당(一貫堂)



도정사(道正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