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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천

우진각 지붕의 단층 목조 한옥 교회당 -영천자천교회(永川慈川敎會)-

노촌魯村 2020. 12. 7. 01:08
      

영천자천교회(永川慈川敎會.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2호. 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773번지)

영천 자천 교회는 개신교 선교 초기의 한옥 교회당으로 영천 지역에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1948년과 1980년에 강단과 출입구 각 1칸씩을 증축한 것을 제외하고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1903년 4월 권혁중이 설립한 교회로, 현 교회당 건물은 그 해 10월에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당시의 관련 자료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구조와 외관은 대체로 한국 목조건축 양식을 따랐으나 내부공간은 전체적으로 서양 초기의 그리스도교 양식인 바실라카식 교회 형식을 일부 채용하고 있다. 특히 내부 출입방식 및 예배공간을 남녀 칸으로 엄격히 구별했던 구한말 유교적 사고방식이 내부공간과 전통 목조가구식에 서양의 트러스 구조가 결합된 복합양식을 보인다. 이는 개신교 선교 초기의 시대적, 건축적 상황과 교회건축의 절충과 토착화 과정을 잘 반영하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예배당의 내부 구조는 초기 한국 교회 예배당 가운데서도 아주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똑 같은 집 두 채를 나란히 한 일(一)자 형태로 배치한 ‘겹집’의 구조를 이루고 있어서 이를 ‘一’자형 예배당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지붕이 넓고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이 지붕을 받치기 위해 두었던 네 기둥 가운데 중앙의 기둥을 중심으로 좌우 공간을 양분하였다. 그리고 또 초기 한국 교회가 남녀를 구분하기 위해 칸막이를 보통 천으로 했던 것과 달리 자천교회는 나무로 되어 있다는 것과, 예배당 뒤쪽에 과거 선교사님과 조사(助師, Helper)들이 묵을 수 있는 방을 만들었다는 것도 독특한 모습이다.

지붕 상부가구는 연등천장이며, 구조는 5량가에 트러스가 보강된 합성 구조를 구사했다.

가구는 내부 중앙 주열 상에 좌우의 대들보를 합보로 받았고, 각 대들보 위에 보아지를 끼운 동자주에 종대공을 결구시켰다.

종대공 위에 역시 동자주를 세워 마룻대를 받는 단순한 구조이다. 각 도리의 간격에 다른 지붕 변작법은 3분 변작법을 적용했다. 한편 지붕가구에서 주목할 것은 전통 목조건축의 5량가 구조에 중대공 좌우로 허술한 트러스 같은 구조로 보강한 점이다. 마치 전통 목조건축 구조에 서양의 트러스 구조를 보강한 듯한 수법을 구사했다. 이는 내부의 공간적 특징과 함께 지붕 가구법에서도 개신교 도입 초기의 교회건축의 일면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전체적으로 부재의 치목이 거칠고 결구 수법이 격식에는 맞지 않지만 자연스러운 구조미를 느끼게 한다.

온돌방은 예배 공간과의 사잇칸에 2분합 들문을 들이고 후면에는 각 칸에 외여닫이 굽널세살문과 고창을 한 세트로 대칭되게 시설했다.

중앙 2칸에는 예배석을 배치하고 예배석 앞으로 강단이 마련되어 있다.

자천교회 외부의 모습은 외벌대의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세워 심벽으로 벽체를 구성하고 창호를 달았다. 하인방 아래로는 심벽으로 처리하고 그 외는 회반죽으로 마감했다. 출입은 양 측면에 남녀 구분해 두었는데, 외여닫이 울거미띠장널문이다. 창호는 양 측면의 출입문 칸을 제외한 예배당 공간에는 각기 쌍여닫이 정자살문의 고창을 두었다

자천교회 예배당 외부 구조의 가장 큰 특징은 우진각 지붕에 있는데 용마루가 아주 짧고 지붕이 넓고 높다는 점에 있어서 여타의 우진각 지붕과는 또 다른 차이점이 있다.

6.25 동란 때 지역이 인민군의 수중에 넘어가자 미군의 공습으로 예배당이 파괴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에 당시 교인들이 지붕에 하얀 횟가루로 ‘CHURCH’ 라고 표시하여 미군의 공습을 피하고 무사히 예배당을 보존한 일화가 있다.

 

고색이 창연한 종탑은 자천교회 뿐만 아니라 온 한국교회의 애환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말 전쟁에 광분한 일본은 무기를 비롯한 문자 공급을 위해 교회의 종을 수탈해 갔다. 자천교회는 빼앗긴 종을 대신하여 1947년에 새 종을 마련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성학당(새별배움터)은 새로운 세대와 교인을 위한교육공간이다.

신성학당의 유래는 과거 서당훈장이었던 권헌종 장로가 자천교회 내에 설립한 2년제 소학교인 ‘신성학교’에서 비롯된다.

1913년 50명의 신입생으로 시작된 신성학교는 서당을 대신하여 교회가 근대적 공교육의 장을 감당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현재 신성학당은 Church Stay, 한국기독역사교실, 독서교실, 문화체험교실, 작은 음악회 등의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영남신학대학교 영성 훈련장과 전국 교회의 각종 수련회 및 소그룹 교육과 모임 장소로 이용된다.

바실리카(라틴어: Basilica)는 원래 고대 로마인들의 공공건물(고대 그리스의 경우에는 주로 법정을 칭함)을 칭하는 데 사용한 라틴어로 대개 고대 로마 마을의 포롬에 있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들의 경우, 공공 바실리카는 기원전 2세기에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소화이년昭和二年 정묘丁卯'라는 글씨가 있는 기와
안내해주신 자천교회 장로님(왼쪽 두 번째)과 우리 일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