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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천

영천조양각(永川朝陽閣)

노촌魯村 2022. 1. 3. 08:01

조양각(朝陽閣)

영천조양각(永川朝陽閣.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경북 영천시 문화원길 6 (창구동))

금호강 벼랑 위에 자리잡은 조양각은 일명 명원루 또는 서세루라고 불린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당시 부사였던 이용이 세운 것이다. 그 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버리고, 지금의 건물은 인조 16년(1638)에 다시 세운 것이다.

앞면 5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누각 안에는 포은 정몽주의 「청계석벽」 등 시 70여 점이 걸려있다.

조양각은 영천지방 문화의 상징으로 영남 7대 누각 중 하나로 손꼽힌다.(출처: 문화재청)

 

고려 공민왕(恭愍王) 17년(1398)에 당시 부사였던 이용(李容)이 건립 한 것으로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현재의 건물은 조선 중종(中宗)이후 에 건축한 것이라 한다. 일명 명원루(明遠樓) 또는 서세루(瑞世樓)라 고도 하는데 누각내에는 포은(圃隱)의 '청계석벽'(淸溪石壁)이라는 시 외 70점의 명현원사(名賢遠士)의 유운(遺韻)이 보존되어 있고, 정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참고자료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중, 257. ; 동해문화)

 

조양각朝陽閣 현판
서세루瑞世樓 현판(금호강 쪽에 걸린 현판)

 조양각(朝陽閣)은 서세루(瑞世樓)라고도 하며, 고려 말에 명원루(明遠樓)로 창건되어 여러 차례 시대의 변란에도 지금까지 우뚝 서있는 영천을 상징하는 유적이다.

조양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누각으로 손꼽히는 경상남도 밀양의 영남루·진주의 촉석루 등과 함께 영남 3루라고도 전하며, 안동의 영호루·울산의 태화루·양산의 쌍벽루·김천의 연자루와 합쳐 영남 7루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영천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비롯해 수많은 명현들이 조양각을 거쳐 갔으며 현재까지 그들의 시가 편액되어 남아있다.

영천은 조선 시대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영남대로의 중간 지점으로 금호강변의 조양각에서 왜의 조선통신사가 기착점으로 이용하고 마상연(馬上宴) 등 큰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창건 당시와 조선 시대의 규모와 모습은 잃었으나 여전히 금호강 청석벽 위에 늠늠하게 서 있다. 현재 영천 문화원이 그 옆에 위치해 영천 문화의 초석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대구·경산·의성·군위·청송·경주·포항 등지에서 영천을 거쳐 타 도시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 조양각을 거쳐야 했다. 당시에는 영천 읍성이 있어 읍성내의 동서남북 대로의 교착지점에 조양각이 있었기 때문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조양각의 창건과 중건

조양각의 원래 명칭은 명원루(明遠樓)로, 1368년(고려 공민왕 17) 당시 부사였던 이용이 정몽주와 함께 보현산에서 원류한 남천의 절벽 위에 지은 건물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1482년(성종 13) 군수 신윤종(申允宗)이 동서 별실을 고쳐서, 동을 청량당(淸凉堂), 서를 쌍청당(雙淸堂)이라 명명했다. 이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는데, 1637년(인조 15) 군수 한덕급(韓德及)이 명원루 터에 누사(樓榭) 열다섯 칸을 중건하고 조양각이라 하였다.

1676(숙종 2)에는 군수 이만봉(李萬封)이 중수하고, 1702년(숙종 28)에 군수 권영경(權寧經)이 중창하였다.

1742년(영조 18)에는 군수 윤봉오(尹鳳五)는 세 번째로 중창한 누사(樓榭)에 ‘서세루(瑞世樓)’[현재 배면(背面)에 현판되어 있음]라 편액하고, 내문(內門)을 남덕문(覽德門), 외문(外門)을 곤구문(崑邱門)이라 하였다. 이후 1763(영조 38), 1797년(정조 21), 1810년(순조 10), 1870년(고종 7), 1886년(고종 23)과 1921년에 각각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1920년대에 이르러 일본인들이 영천 심상소학교를 지을 때 누사의 내·외문을 비롯한 건축물을 철거하여 지금과 같이 위축되고 말았다.

조양루를 다녀간 명현달사

서거정(徐居正)은 “군 이름을 영천[永]이라 일컫는 것은 ‘두 물[二水]’의 뜻을 취한 것이다. 대개 두 물이 자모산에서 발원하여 두 갈래로 나뉘어 꺾여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군 앞에 이르러 합쳐져서 하나가 된다. 그래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라고 명원루 기문(記文)에서 밝혔다. 또 명원루라는 이름은 당나라 문장가인 한퇴지(韓退之)의 시 가운데 ‘원목증쌍명(遠目增雙明)’[훤히 트인 먼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마저 밝아오는 듯하다]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고, 이어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울산의 태화루(太和樓), 양산의 쌍벽루(雙碧樓), 김해의 연자루(燕子樓)를 두루 둘러보았지만 이 누각이 그 어느 곳에도 빠지지 않는도다.” 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율곡(栗谷) 이이(李珥) 등 많은 명현달사(名賢達士)가 다녀가고 그들이 남긴 많은 시들이 현판에 새겨져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조양각과 포은의 사행(使行) 공적

정몽주는 중국 명나라 및 왜구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시기에 명나라에 여섯 차례, 일본에 한 차례 등 도합 일곱 차례 국교의 큰 임무를 수행하였다. 1372년(공민왕 21) 서장관(書狀官)으로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경사(京師)에 가서 촉(蜀)을 평정함을 축하하고 유학생의 수용을 허락받고 돌아오는 길에 큰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어 속수무책 죽음의 길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명 태조의 칙서와 외교문서가 담긴 보자기를 잃지 않기 위해 가슴에 품고 허리띠로 동여매고, 구사일생 암도(巖島)에 이르러 칠갑(漆甲)을 뜯어먹고 13일간 연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황제가 선박을 보내어 구하고 은휼(恩恤)을 두터이 하였으니, 정몽주는 첫 외교부터 죽음을 무릅쓰고 명제(明帝)와 화친(和親)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 1375년(우왕 원년)에 왜구의 침탈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고려에서는 나흥유(羅興儒)를 패가대(覇家臺)에 사신으로 보내어 화친하도록 타일렀으나, 왜의 주장(主將)이 나흥유를 가두어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1377년(우왕 3) 정몽주는 평소 원한을 품고 있던 권신들의 천거로 사신으로 가게 됨에, 주변에서는 다 위태하다며 말렸으나, 어려워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으며, 사신으로 가서는 고금의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극진히 설명하니 경복하여, “내 오늘 성현(聖賢) 다음가는 사람을 만났다.” 하고 그 대접이 매우 후하였다.

정몽주가 중심이 되어 만든 명원루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탔다. 그 터에 다시 누각을 세워 조양각이라 이름 지으니, 이곳은 조선통신사에게 너무나 특별한 장소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조양각은 서울에서 출발한 통신사가 도일(渡日)을 위해 부산으로 향하는 사행노정 속에 포함되어 있다.

조양각에서 피곤에 지친 역마를 갈아타고, 사행 관련 인원을 차출하며, 선원을 제외한 사행원들의 집결 장소였다. 게다가 경상 감사가 베푸는 전별연(餞別宴)에서 일본의 집권자에게 선보일 마상재(馬上才)가 시연되기도 했던 곳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영천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비롯해 수많은 명현들이 조양각을 거쳐 갔으며 현재까지 그들의 시가 편액되어 남아있다.

   

조양각에서 본 금호강
조양각에서 본 금호강
조양각에서 본 금호강
조양각과 문화원 사이에 있은 황성옛터 노래비

‘황성옛터’의 본래 제목은 ‘황성荒城의 적跡’이었다. 황성옛터는 황폐해진 궁궐터를 의미하며 고려의 개성의 궁궐터인 만월대를 의미한다.

황성옛터는 왕평이 작사하고 전수린이 작곡한 곡으로, 최초로 한국인이 작사 작곡한 대중가요로 평가 받는다.

          

1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못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2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3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속 깊이 안고

이 몸은 쓰러져 가노니 옛터야 잘있거라

    

작가 백신애白信愛의 고향 비

백신애(白信愛. 무잠(武潛).백무동(白戊東). 박계화(朴季華))

백신애(白信愛)관련항목 보기[1907-1939]는 프로 문학이 퇴조현상을 보이고 있던 1930년대 초기에 혜성처럼 나타나 작품을 쓰기 시작한 여류 소설가이다.

영천시 창구동[농협중앙지점 건너편 우미일식 자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으며, 11살 때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7살 되던 해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자인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서울로 올라가 1927년 여성 동우회와 여자 청년 동맹에 가입하여 열정적이고 이상에 찬 계몽운동에 정열을 쏟았다.

결국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시베리아로 건너가게 된다.

정열적이고 낭만적인 그녀는 32세로 요절하기까지 ‘적빈’을 비롯하여 10여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겨 여류 문학사에 금자탑을 이루었다. 더욱이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나의 어머니’가 하루 저녁에 쓴 글이라고 하니 그녀의 뛰어난 재질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영천은 조선 시대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영남대로의 중간 지점으로 금호강변의 조양각에서 왜의 조선통신사가 기착점으로 이용하고 마상연(馬上宴) 등 큰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조양공원 내 비석 군
산남의진비山南義陣碑 대장정공양세순국기념大將鄭公兩世殉國記念(조양공원 옆 영천문화원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