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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천

황성옛터 노래비

노촌魯村 2022. 1. 6. 20:09
                                                      

‘황성옛터’의 본래 제목은 ‘황성荒城의 적이었다. 황성옛터는 황폐해진 궁궐터를 의미하며 고려의 개성의 궁궐터인 만월대를 의미한다.

황성옛터는 왕평이 작사하고 전수린이 작곡한 곡으로, 최초로 한국인이 작사 작곡한 대중가요로 평가 받는다

1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못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2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3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속 깊이 안고

이 몸은 쓰러져 가노니 옛터야 잘있거라

 

경북 영천시 창구동 조양공원에 가면 ‘황성옛터’ 작사가 왕평을 추모하는 ‘황성옛터’ 노래비가 있다.

‘황성옛터’ 또는‘황성의 적(荒城의 跡)’은 일제 강점기 1928년에 발표된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로, 한국인이 첫 번째로 작사와 작곡을 한 대중가요이다.

작사가 왕평(王平 1908년?~1940년)은 자는 광희(光熙), 본명은 이응호(李應浩)이며 영천에서 태어나, 5~7세에 청송군에서 잠시 살았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현철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의 제1기 입학생으로 들어가 연기를 공부했다.

배우뿐 아니라 극작가와 대중가요 작사가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30년대 초에는 조선연극사의 전속 작가로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에는 포리돌레코드의 조선 지점 설립에 관여한 뒤 문예부장을 맡았다.

「황성옛터」·「대한팔경」·「비단장사 왕서방」·「조선 행진곡」·「항구의 일야」 등 일제 강점기 때 민족의 애환을 담은 노랫말, 「5만원의 재보」·「경성야화」·「도적과 황금」·「홍길동전」 등 극본, 「돌아온 아버지방」·「나그네」·「남매」 등 연극 주연 작품이 있다.

1940년에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연극 ‘남매’를 공연하다가 무대에서 쓰러져 30대 초반의 나이로 요절했다.

 

1989년 9월 26일에 왕평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시 조양공원에 ‘황성옛터’ 노래비가 건립되었다. 노래비 뒷면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혼을 심은 우리들의 노래 ‘황성 옛터’ 그 노래를 지은 왕평 이응호 님을 기려 여기 억겹으로 살아 숨쉴 생명의 돌을 세우노라


님은 어둡고 처절했던 일제 후반기에 작사 작곡을 하면서 연극 연화를 했고 극본을 쓰면서 민족정기를 일깨운 영천이 낳은 천재요 시들지 않는 예술인이다.


비록 34세로 요절한 비운의 일생이지만 님이 남긴 자취는 영원히 우리들 가슴에 푸른빛으로 남으리라
  

     

왕평(王平. 광희(光熙).이응호(李應浩))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
황성 옛터 음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