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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안동

안동 이천동 석불상(安東泥川洞石佛像)

노촌魯村 2022. 2. 10. 19:13
                

안동 이천동 석불상(安東泥川洞石佛像. 보물. 경상북도 안동시 이천동 산2)

자연암벽에 신체를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은 전체 높이 12.38m의 거구의 불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도 이와 거의 같은 수법을 보여준다.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어 거구의 불상임에도 전체적인 형태는 자연스럽다. 머리와 얼굴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되었음이 분명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몇 개 안되는 옷주름은 매우 도식적(圖式的)으로 표현되고 있다. 양 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어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거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상 양식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안동 이천동 석불상은 속칭 ‘제비원 석불’이라 불리는 마애불의 일종이다.

서쪽을 향한 높은 암벽에 불신을 얕게 새기고 암벽의 위에 불두를 따로 조각하여 올려놓았는데, 머리 뒷부분은 수직으로 잘려나갔다.

얼굴 위의 머리 부분은 소발(素髮) 위로 육계(肉髻)가 크게 솟아나게 만들었는데 얼굴 부분과 또 다른 돌로 만들어 얹었다.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현재 국가 소유이며, 안동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얼굴은 풍만하며 눈썹 사이에 백호를 양각으로 크게 새겼다. 좁고 길게 묘사된 눈과 그 위로 반원형의 눈썹이 우뚝 솟아 있는 코의 윤곽선에 연결되어 있다.

크지 않은 입술은 두툼하고 다부지게 보이는데,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목은 삼도(三道)가 뚜렷하며, 수직 암벽에 새긴 몸체는 굵은 직선으로 음각하여 단순하게 보인다.

법의는 통견(通絹)으로 왼쪽 어깨에서 완만하게 흘러내린 옷주름이 오른쪽에서 수직으로 드리워진 법의 자락과 교차되어 접히고, 넓게 트인 가슴 밑으로 내의(內衣)의 띠가 보인다.

수인(手印)은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오른손을 복부에 대고 왼손은 손들이 보이도록 가슴 위로 올렸다. 불상의 발밑에는 큰 단판의 연꽃이 음각된 대좌가 있다.

불상이 새겨진 암벽의 맞은편에도 또 다른 수직 암벽이 서 있고, 두 암벽으로 형성된 좁은 공간의 북쪽 역시 가파른 바위 절벽으로 막혀 있어 이 불상 앞은 석굴처럼 좁은 공간을 이루고 있다.

17세기 초의 안동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는 불상 위로 기와지붕이 덮여 있었다고 하며 634년(선덕여왕 3)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불두를 따로 만들어 암벽 위에 새긴 불신 위에 올린 마애불 양식의 거대 불상은 고려 전기에 널리 유행하였으며 이 불상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동 이천동 석불상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거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상 양식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자연암벽에 신체를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은 전체 높이 12.38m의 거구의 불상이다
얼굴 위의 머리 부분은 소발(素髮) 위로 육계(肉髻)가 크게 솟아나게 만들었는데 얼굴 부분과 또 다른 돌로 만들어 얹었다
목은 삼도(三道)가 뚜렷하며, 수직 암벽에 새긴 몸체는 굵은 직선으로 음각하여 단순하게 보인다.
얼굴은 풍만하며 눈썹 사이에 백호를 양각으로 크게 새겼다. 좁고 길게 묘사된 눈과 그 위로 반원형의 눈썹이 우뚝 솟아 있는 코의 윤곽선에 연결되어 있다.
머리와 얼굴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되었음이 분명하다.
불상이 새겨진 암벽의 맞은편에도 또 다른 수직 암벽이 서 있고, 두 암벽으로 형성된 좁은 공간의 북쪽 역시 가파른 바위 절벽으로 막혀 있어 이 불상 앞은 석굴처럼 좁은 공간을 이루고 있다.

안동이천동삼층석탑(安東泥川洞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경북 안동시 이천동 산2번지)

연미사 뒷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이 탑이 보인다. 함께 있는 거대한 석불상(보물 제115호) 뒷편에 흩어 있던 것을 복원해 놓은 것으로, 예전에는 이곳이 연미사의 자리였다고 한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1층으로 두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꾸밈이 없는 단조로운 모습이며,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솟아올라 가벼움을 이끌어내었다.

주위의 자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탑으로, 석불상과 같은 시기인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연미사(燕尾寺. 경상북도 안동시 이천동 708-4)

연미사라는 이름은 원래 조선시대 때 여행객이 쉬어가는 숙소인 연비원(燕飛院), 속칭 제비원에서 유래했는데, 당시 연미사 석불을 제비 모양의 누(樓)가 덮고 있었으며, 법당이 제비의 부리에 해당한다 하여 연미사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연미사 석불은 “성주 본향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 본일러라.”라는 「성주풀이」 사설에 나오듯 우리 민속 신앙의 정신적 기둥으로 자리매김 되는 바탕이기도 하다. 때문에 연미사가 사찰로서는 매우 작은 규모이기는 하나 미륵불이 담고 있는 미술적·민족적 유산은 그 어느 것보다 값진 보배라 할 수 있다.

연미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의 제자인 명덕(明德)이 634년에 건립하였다고 하며, 『영가지(永嘉誌)』관련항목 보기에는 634년 건립한 후 두 차례 중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행인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연비원이 있었다.

고려 때 불상의 머리가 떨어져 복원한 뒤 삼층석탑을 조성하고 법당을 중수하였다.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었으나 1918년 복원을 시작으로 1943년과 1947년에 중수하였다. 1950년 이후에 법당을 새로 세웠으며, 1978년 원래 정면 3칸, 측면 1칸인 대웅전을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증축하였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연미사 대웅전 불상
산령각山㚑(靈의 俗字)閣
산신 탱화
이남선생. 이태희선생. 김성길선생. 김성호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