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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안동

의성김씨학봉종택(義城金氏鶴峰宗宅)

노촌魯村 2022. 2. 18. 12:18

의성김씨학봉종택(義城金氏鶴峰宗宅. 경상북도 기념물.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56번지)

조선 중기 문신 학봉 김성일(1538∼1593) 선생의 종가이다.

김성일은 선조 1년(1568)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과 수찬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경상도 초유사로 관군과 의병을 화합시켜 의병의 전투력 향상에 큰 공을 세웠다. 퇴계의 제자로 뛰어난 성리학자이기도 한 그의 학문은 이후 영남학파의 학문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옥은 一자형 안채와 사당, 문간채, 풍뢰헌, 운장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장각은 유물의 보관과 전시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선생의 유품과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과 옛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의성현 제일의 토성인 의성 김씨는 고려 말에 사족으로 성장하여 안동으로 이주하면서 전형적인 영남 사림파로 발전한 가문이다.

학봉 (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종택은 원래는 현 위치에 지어졌으나 지대가 낮고 침수가 자주된다 하여 김성일의 8세손인 광찬(光燦)이 그의 나이 27세이던 1762년에 현 위치에서 100m가량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邵溪書堂)이 있던 자리에 새로 종택을 건립하고 종택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그러나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건전하였는데 이때 종택의 사랑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소계서당으로 사용케 하고 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을 종택의 사랑채로 사용하였다.

정침은 '口'자형의 평면을 취하고 있으나 최근에 좌측으로 아래채를 달아내어 전체적으로 보면 '一'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가구는 모두 5량가의 간결한 구조이다. 정침의 우후측(右後側)에는 3칸 규모의 사당을 배치하였으며 주위에는 토석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였다.(참고자료 : 영남사, 1996, <<안동의 문화재>>, 518)

 

의성김씨 학봉 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된다며 김성일의 8세손 김광찬(金光燦)이 1762년(영조 38) 이곳에서 100여m 떨어진 현재 소계서당(邵溪書堂)이 있는 자리에 옮겨 살았고, 의성김씨 학봉 종택이 있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한다.

그러다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이때 종택의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두어 소계서당으로 쓰도록 하였고, 소계서당을 개조하여 종택의 사랑채로 꾸며 사용하게 되었다.

근년에 지은 5칸 규모의 서북쪽으로 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왼쪽에 정침과 그 뒤쪽의 사당이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마당 건너편에는 근년에 지은 운장각(雲章閣)과 정자가 서북향으로 나란히 앉아 있다.

정침은 ‘ㅁ’자에 양익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최근 왼쪽에 직각으로 ‘一’자 아래채를 달아내어 사(巳)자형으로 바뀌었다.

정침의 정면 오른쪽에는 사랑채가 돌출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2칸통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1칸씩 두고 앞면에 길게 툇마루를 둔 중당협실형의 소계서당이었던 건물을 개조하면서 왼쪽 2칸을 사랑방으로 꾸미고, 오른쪽의 2칸은 사랑 마루방으로 만들었다.

사랑방 왼쪽에는 2칸통의 작은 사랑방을 두었으며, 뒤로는 1칸 책방을 놓아 안채의 우익사에 연결하였다.

안채는 오른쪽 3칸을 대청으로 꾸미고, 왼쪽에는 안방 2칸을 두고 끝에 부엌을 놓았으며, 그 앞쪽의 좌익사는 식당 등으로 내부가 개조되었다. 사랑채나 안채의 상부 가구는 5량가이고,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올렸다.

정침의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 3칸을 배치하고 토석 담장을 둘러 별곽을 이루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풍뢰헌
정침의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 3칸을 배치하고 토석 담장을 둘러 별곽을 이루었다.
안채
학봉기념관
우리나라 최초 안경

안경 : 1577년 학봉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가져온 우리나라 최최의 안경이다. 안경알은 옥돌이며 안경테는 거북등뼈로 만들었다. 학봉의 신문물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