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장사 청련암(南地藏寺 靑蓮庵.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남지장사길 127(우록리 865))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있는 남지장사의 부속 암자. 지장사(地藏寺)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신앙의 중심으로 모시는 도량이다.
지장이란 땅은 여러 가지 보배를 간직하고 종자를 양육하는 것과 같이 중생을 장양(長養)한다는 의미이다.
지장보살은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까지 무불(無佛)의 세계에서 중생을 계도하는 보살을 말한다. 즉 지장 신앙은 지장보살의 가르침에 따르고 지장보살의 이름을 정성껏 부르면 현세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현세 기복적 신앙이다.
창건 설화에 의하면 남지장사(南地藏寺)는 684년(신문왕 4)에 양개 조사(良介祖師)[807~869]가 창건하였다.
신라 시대에는 왕이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유지들도 시주를 많이 하여 사세가 매우 컸다. 한때는 8개의 암자를 거느렸고 수도하는 승려만도 3,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궁예(弓裔)[?~918]가 일으킨 전쟁 때 폐사되었다가 1263년(원종 4)에 일연(一然)[1206~1289]이 중창하였다.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사이에 무학 대사(無學大師)[1327~1405]가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승병 훈련장으로 이용하였다.
당시 승병과 의병장 우배순이 거느린 의병이 함께 훈련하였는데, 모두 3,000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왜군에게 점령되어 불에 탔다.
1653년(효종 4)에 인혜(印惠)가 중건하였고, 1767년(영조 43)에 모계(慕溪)와 풍흡(豊洽)이 남지장사를 중창하였다.
모계가 중창한 뒤 팔공산동화사 부근의 북지장사(北地藏寺)와 대칭되는 곳에 있는 절이라고 해서 절 이름을 남지장사로 바꿨다고 한다. 그 전의 절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1940년대에 신원(信元)이 중수한 이후 꾸준히 불사를 일으켰으며, 1970년대에 남지장사 백련암(南地藏寺白蓮庵)과 남지장사 청련암, 요사 및 대웅전을 보수하였다. 그러나 양개는 신라로 넘어온 일이 없으며 남지장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 684년 또한 양개의 생애에 해당하지 않는 연대이다.
이 창건 설화를 역사적 사실로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양개의 창건 설화는 18세기 인악의첨(仁岳義沾)[1746~1796]이 『인악집(仁岳集)』에 남긴 글인 「남지장사 전우소화 중수기(南地藏寺殿宇塑畵重修記)」 현판의 일부에서도 확인된다. 이 자료에 의하면 1680년(숙종 6)에 대덕 승민(大德勝敏)이 남지장사 청련암(南地藏寺靑蓮庵)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1806년(순조 6)에 화재를 당하여 소실되었고, 1808년(순조 8)에 재건하였으며, 1970년대에 보수하였다.
1995년 5월 12일에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전면에 매우 높은 석축을 조성한 관계로 정면에서 인법당(因法堂)으로 바로 출입하기가 곤란하여 우측으로 문을 낸 후 남서향으로 법당을 앉혔다. 그리고 배면에 낮게 축대를 만들고 삼성각을 남향으로 축을 틀어 배치하였다.
법당인 인법당에는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남지장사 청련암의 중심 건물로 법당의 기능과 요사(寮舍)의 기능이 혼합되어 있다. 따라서 평면의 구성이 사찰 건축의 일반적인 구조와는 달리 가운데 3칸의 법당을 중심으로 좌측에 방 2칸이 이어 붙어 있고 우측으로 부엌이 자리한다.
전후에는 툇간을 내고 좌측 전면으로 방 1칸과 마루 1칸을 덧대어 일견 민가의 사랑채를 연상시키며, 부엌 뒤편으로도 방 2칸을 더 두었다. 또한 우측 반 측면에 퇴를 내면서 전면 쪽으로 가림 벽을 설치하여 시선을 차단하였다.
법당이 있는 건물은 6칸의 정면 건물 오른쪽 뒤와 왼쪽 앞으로 각각 3칸 건물을 이어 지어 평면 배치가 특이하다.
구조는 소박하면서 부분적으로 고식 수법(古式手法)이 남아 있다.
중앙은 정면 3칸, 측면 2칸, 즉 6칸 규모의 법당인데 구들을 들이고 천장이 평평하다.
여느 절의 요사나 강당 같아 부엌 쪽으로 받침이 있고 그 반대쪽으로 2칸의 구들이 달렸다. 받침이 있는 부엌은 넓이가 4칸이나 되는 넓은 공간이다.
건물의 양식은 무익공 소로 수장(小櫨修粧)으로 정면과 배면 밖 둘레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하였으며, 동자 대공을 세운 삼량 구조에 정자형·팔작형·맞배형을 혼합하여 지붕을 꾸몄다.
삼성각은 전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로,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3면은 두꺼운 벽으로 폐쇄하였으며 전면에만 출입문을 두었다.
어간(御間)은 궁 널을 끼운 쌍여닫이 띠살문을 설치하고 양 협간은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최근에 보수하여 부분적으로 부재들이 교체되었고 모로 단청[목부재의 끝부분에만 머리 초 문양을 장식]을 올린 흔적이 역력하다. 또 홑처마 맞배지붕에 풍판(風板)을 두었으나, 건립 연대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남지장사 청련암(南地藏寺 靑蓮庵.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대구 달성군 가창면 남지장사길 127 (우록리))
남지장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4년(684)에 양개조사가 세운 절이라고 전한다. 조선시대에 고승 무학대사가 수도한 곳이기도 하며,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효종 4년(1653) 인혜대사가 청련암과 함께 다시 세웠으나, 순조 6년(1806)에 또 화재를 2년 뒤 다시 세웠다고 한다.
청련암은 법당과 생활공간의 기능을 겸한 특이한 평면을 가진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그러나 실제로 법당의 기능보다 강당의 기능을 가진 건물로 ‘인법당’으로도 부르고 있다.
남지장사 청련암은 부분적으로 옛 건축수법을 간직하고 있는 소박한 구조의 건물이다.(출처 : 문화재청)
남지장사 청련암(南地藏寺 靑蓮庵) 홍매화
봄을 알리는 여러 꽃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것 중 하나가 매화다.
매화는 또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엄동설한을 이겨내는 세 벗(歲寒三友) 중의 하나로, 군자의 지절을 상징하기도 한다.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뜻하는 '아치고절'(雅致高節)도 매화를 표현한 말이다.
雅致高節아치고절(雅:우아할 아. 致:풍취 치. 高:높을 고. 節:절개 절) : 고상하게 운치가 있는 높은 절조.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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