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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주

영주 소수서원(榮州 紹修書院)

노촌魯村 2022. 5. 9. 00:01

출처 : 소수서원

紹修書院(소수서원. 사적 제55호.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내죽리152-8))

서원은 조선시대 유림의 사상적 본거지이자 활동기반으로서 유림의 운명공동체로 강학(講學)과 제향(祭享) 두 기능을 담당했다.

서원은 강학과 제향기능을 가진 점에서는 관학(官學)과 차이가 없지만 제향의 대상이 공자와 그의 제자인 성현(聖賢)이 아닌 우리나라 선현(先賢)이라는 점과 중앙정부가 아닌 유림이 그 설립주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관학 중심이던 조선초기의 교육제도는 중기를 지나면서 세조의 왕위 찬탈반대에 참여한 집현전 폐지와 연산군에 의한 성균관의 황폐화 등으로 국가지원의 부족으로 관학은 점차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처럼 관학이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되면서 학덕을 겸비한 유학자들은 개인적으로 서재(書齋), 정사(精舍) 등의 사학(私學)을 설립하여 학문을 보급하고 학문을 계승하였다.

중종반정 후 중종은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면서 성균관을 중수하는 등 관학 중심으로 한 교학진흥책을 추진하였으나 효과를 얻지 못했고, 이에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세력이 의리명분을 바탕으로 하고 민심수습과 내적 인격도야를 추구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문풍토를 추구하며 도학(道學)정치에 기초한 교학진흥책을 제시하였다. 그 교학진흥책 중 하나가 바로 문묘종사(文廟從祀)운동이었다. 이는 유림의 학문적 우월성과 정치적 입장을 강화해주는 측면과 함께 향촌민의 교화라는 명분으로 서원 발생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후 선조 때에 이르러 유림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서원은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서원은 도학을 이상으로 삼던 사대부 사림세력들의 정신세계가 반영된 조선시대 유교사회의 대표적 산물이다.

조선 성리학의 문화유산인 서원은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선현에게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향촌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신적 지주 역할로 후에 지방유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견제 기반으로써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조선중기 교육적 기능이 쇠퇴의 기미를 보이던 관학에 대응하여 새로운 교육활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던 서원은 과거시험과 법령의 규제에 얽매인 관학과는 달리 학문의 자율성이 존중되어 출세주의나 공리주의(功利主義)가 아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던 민족교육의 산실이자 유교적 인재 배출의 요람으로 1543년(중종38년)에 3명의 입원유생을 시작으로 1888년까지 모두 4,300여 명이 배출되었다.(출처 : 소수서원)

 

영주榮州 소수서원紹修書院 숲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榮州 宿水寺址 幢竿支柱)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榮州 宿水寺址 幢竿支柱.  보물.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8번지)

당간지주는 사찰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이 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은 소수서원 입구 소나무 숲에 남아 있는 것으로, 서원 내에 아직도 당시 숙수사의 여러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위치가 원위치로 보인다.

숙수사는 통일신라 전기에 창건된 사찰로,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 소수서원의 건립으로 폐사된 듯하다.

당간은 마주보는 면의 바깥면 중앙에 세로띠를 새기고, 꼭대기에서 1.17m 밑에서 부터 2.34m 까지 사이가 면이 쑥 들어가 있어서 마치 넓은 홈을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네모난 기둥 끝으로 올라가면 약간 가늘어지고, 맨 끝은 둥글게 경사지도록 하였다. 꼭대기 끝 안쪽 면에는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원래는 지주와 당간을 받치던 바닥돌이 있었을 듯하나, 현재는 지주 양쪽으로 길고 큰 돌 1장씩이 놓여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소박하며 돌을 다듬은 솜씨도 세련되어 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출처 : 문화재청)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榮州 宿水寺址 幢竿支柱)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榮州 宿水寺址 幢竿支柱)
경렴정(景濂亭)

경렴정(景濂亭)

 

경렴정은 소수서원의 대표적 유식공간으로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이다. 중종 38년(1543)에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만들면서 함께 세웠다.

‘경렴’은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이를 추모한다는 뜻으로 주돈이의 호인 염계의 첫 글자 ‘렴’과 우러러 사모한다는 ‘경모’에서 ‘경’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현판 중 해서* 현판은 이황의 글씨이고, 초서**현판은 이황의 제자이면서 초서의 대가인 고산 황기로의 글씨이다. 정자 내부에는 이황과 주세붕 등이 자연을 노래한 시를 적은 시판이 걸려 있다.

경렴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가운데 하나로, 소수서원 원생의 풍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경렴정은 서원과 주변 자연을 이어주는 공간에 있는데, 이곳은 죽계(竹溪)를 끼고 주변을 조망하기에 좋은 장소여서 원생이나 유림의 모임, 시회*** 개최, 풍류와 심신 수양 등의 활동을 하였다. (출처 : 문화재청) 

 

경렴정(景濂亭)
성생단 ( 省牲壇 )

성생단(省牲壇)

성생단은 제사에 쓸 제물을 검사하는 단으로, 생단이라고도 한다. 소수서원에서는 의식의 순서를 적은 『홀기(笏記)』에 따라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에 제향을 지낸다. 제향 전날 선택한 제물을 올려 두고 흠집 여부를 살펴보던 곳이 성생단이다.

성생의(省牲儀) 또는 충돌례(充腯禮) 등으로 불리는 제물을 검사하고 품평하는 의식, 즉 생간품(牲看品)은 제관들이 성생단 주위에 서서 진행한다. 서쪽에 선 축관(祝官)**이 성생단에 준비된 제물이 정결한지를 ‘돌(腯)’하고 묻고 헌관(獻官)***이 좋다고 판단하여 ‘충(充)’ 하면 의식이 끝나고 제물을 잡는다. 원래 소를 제물로 사용하였으나, 소 도살 금지령이 내리면서 돼지로 바뀌었다.

이 성생단은 소수서원의 제향 의식을 알려 주는 자료이다. 서원의 성생단은 보통 사당 근처에 있지만, 소수서원의 성생단은 특이하게 서원 입구에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초정일: 음력으로 표시된 날짜 가운데 매달 처음 ‘정(丁)’ 자가 들어 있는 날로, 음양오행을 기준으로 할 때 붉은색 날에 해당한다.

**축관: 제사 때에 축문을 읽는 사람

***헌관: 제사를 지낼 때 임시로 임명하던 제관

 

지도문志道門
강학당
강학당에 걸린 소수서원(紹修書院) 현판

영주 소수서원(榮州 紹修書院. 사적.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번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출처 : 문화재청)

 

명종어필 소수서원 현판(明宗御筆紹修書院懸板) : 소수박물관 소장

명종어필‘소수서원’ 현판(明宗御筆‘紹修書院’懸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의 현판으로, 사액서원으로 될 당시 조선시대 명종이 이름을 지어 그것을 직접 쓴 것이다. 사액서원이란 임금이 이름을 지어 그 이름을 적은 현판과 그에 따른 서적·토지·노비 등을 나라에서 내려준 서원을 말한다.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건립할 때는 백운동서원이었다. 후에 풍기군수가 된 이황이 명종 4년(1549) 12월에 서원의 운영을 위하여 경상감사 심통원을 통해 조정에 서원의 편액·토지·책·노비 등을 하사하도록 건의하여 이듬해 4월에 명종의 친필 액자를 하사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소수서원'이란 이름은 당시 대제학 신광한이 왕명을 받아 이미 무너진 교학(敎學)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현재 소수서원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현판은 검은 바탕에 글씨는 돋을새김하여 금칠을 하고 테두리는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으며,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이 현판은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의 현판을 명종이 직접 써서 하사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 ( 榮州 紹修書院 文成公廟)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榮州 紹修書院 文成公廟. 보물.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내죽리))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는 소수서원의 경내에 있는 제향기능의 사당으로 안향을 주향(主享)으로,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 ·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 · 문민공(文敏公) 주세붕(周世鵬)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집으로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좌(柱座)를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 주두를 놓고, 첨차를 내어 그 위에 소로가 주심도리의 장혀를 받치고 보 방향으로는 쇠혀(牛舌)를 내고 안쪽으로는 보아지 모양을 하여 퇴간의 보를 받치는 초익공식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오량으로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종보를 받치고,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건물의 좌측과 뒷편에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사방에 돌담을 두르고, 정면에 외단문을 설치하고 우측에 협문을 두었다.

매년 3월, 9월 초정일(初丁日)날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주세붕이 직접 쓴 제향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홀기문서(笏記文書)가 전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봉안인물

 

회헌안향 (晦軒 安珦, 1243~1306)

처음 이름은 유(裕)요, 후에 향(珦)으로 고쳤으며 회암 주희(晦庵 朱熹)를 흠모하여 스스로 호를 회헌(晦軒)이라 했고 본관은 순흥이며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안향선생은 소백산 정기를 받고 태어나 순흥이 배출한 위대한 인물이며 우리나라에 중국 주자학(朱子學)을 최초로 보급하여 우리나라에 유교의 토대를 만들었다.

16~18세 때에는 숙수사를 왕래하면서 독학으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1260년(원종1년) 18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 개성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6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도첨의 중찬(都僉議中贊)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명관(名官)이었다.

1289년(충렬왕 15년) 11월에는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어 왕과 공주를 호위하며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와 공자, 주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이듬해 3월에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이후 1303년(충렬왕 29년)에는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 을 중국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 72제자의 화상, 문묘에 사용할 제기, 악기와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서(四書), 주자서(朱子書)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1304년 6월 국학의 대성전이 완성되자 거기에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문묘의 제도를 갖추게 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육영재단에 해당하는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해 장학사업을 펼쳐 인재양성을 장려하고 성리학보급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한편 선생이 살던 고려후기는 불교의 폐해와 무인(武人)의 장기집권 및 몽고 침입과 홍건적 난 등 이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국운쇠퇴기였다. 이러한 때에 안향 선생은 중국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도입해 새로운 학풍으로 어지러운 통치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안향 선생의 이러한 노력으로 마침내 주자학을 수양(修養)과 치세(治世)의 원리로 삼은 성리 학자들 중심으로 되어 훗날 조선을 개창하게 되고 조선이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 민족의 스승으로, 동방 도학(道學)의 비조로 추앙받게 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訥木里) 구정동(口井洞)에 있다. 한편 1917년에는 중국 공자의 77대손인 공덕성(孔德成) 씨가 회헌 안향선생을 ' 안자(安子)' 로 높이 찬양하여 지은 찬문과 안자묘(安子廟) 편액친필글씨를 보내왔다. 또한 공자의 76대손인 공영이(孔令貽)씨는 회헌 안향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보내왔다. 공덕성씨와 공영이씨가 보내온 안자묘 편액친필글씨와 회헌 안향의 신도비명은 1977년 경기도 시흥시 의왕읍에 안자묘 건립과 함께 그곳에 보존되고 있다.

 

성인의 학문을 모아 집대성한 분은 공자이시고

현인의 학문을 모아 집대성한 분은 주자이시고

공자와 주자를 조종으로 삼아 동방성리학을 집대성한 분은

고려의 안자(安子: 안향 선생을 높여 칭한 말)이시다.

( 集群聖之大成者孔子也 )

( 集群賢之大成者朱子也 )

( 祖孔宗朱以啓東方之聖學者安子也)

- 중국 공덕성씨가 안향선생을 찬양한 찬문 全文

 

근재안축 (謹齋 安軸, 1287~1348) : 고려말기 문신.

고향죽계(竹溪)를 세력기반으로 하여 중앙으로 진출한 신흥유학자(新興儒學者)로 재능과 학문이 뛰어났다,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순흥(順興).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 사헌규정(司憲糾正)을 지내고 1324(충숙왕 11) 원(元)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개주판관(蓋州判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 성균학정(成均學正)을 거쳐 충혜왕(忠惠王)때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로 파견되었으며, 이 때 충군애민의 뜻이 담긴 "관동와주 關東瓦注"를 남겼다. 1332년(충숙왕복위 1) 판전교(判典校), 지전법사(知典法事) 재직시 파면당했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되었으나 내시의 미움으로 받아 파직되는 등 파면과 복직을 되풀이하였다. 충혜왕이 복위한 뒤 다시 전법판서, 감찰대부(監察大夫)에 등용되었으며, 상주목사(尙州牧使),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등을 지내고 1347년(충목왕 3)에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量田) 행정에 참여했다.

그 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등과 함께 고쳐 엮었고, 충렬, 충선, 충숙 3조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關東別曲), 죽계별곡 (竹溪別曲)을 남기는 등 학문과 문장이 높았으며 저서에 근재집 (謹齋集)이 있다.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진 뒤 죽어 배향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안보(安輔, 1302~1357) : 고려말기 문신.

자는 원지(員之), 본관은 순흥(順興).

안축(安軸)의 동생으로 1544년(중종 39)에 함께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320년(충숙왕 7) 문과에 급제하고, 경주사록(慶州司錄), 수찬, 편수관등을 지냈다. 1345년(충목왕 1) 원(元) 나라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요양행중서성조마겸승발가각고(遼陽行中書省照磨兼承發架閣庫)로 있다가 귀국한 뒤, 전법판서(典法判書), 동지공거(同知貢擧), 정당문학(政堂文學), 동경유수(東京留守)등을 지냈다.

이색(李穡)은 묘지에서 "선생은 성품이 활달하고 사기를 즐겨 읽었으며 일함에 있어 대세(大勢)를 따라 조금도 치우침이 없었고 화려함을 버리고 뜻을 전달함을 취할 뿐 이었다"라고 평하고 있다.

 

신재 주세붕 (愼齋 周世鵬, 1495 ~ 1554)

주세붕 선생은 조선시대 석학이며 도학자로 호는 신재(愼齋), 본관은 상주(尙州), 시호는 문민공(文敏公)이며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의 시초인 백운동서원의 창건자이다.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漆原)면 출생으로 1522년(중종 17) 생원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에 급제한 뒤 정자(正字)가 되고, 검열(檢閱)·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다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고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좌천되었다.

주세붕 선생은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37년) 평소 흠모하던 고려 말의 학자 안향선생을 주향하고 향촌교화를 위해 안향선생이 어린 시절 수학했던 숙수사 터에 서원을 건립한다.

서원을 통하여 사림을 교육하고 아울러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 하려는 목적으로 유생들과 강론(講論)하는 등 열의를 보였다.

주세붕 선생이 이곳에 사묘를 건립한 것은 안향 선생의 영정을 모셔오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1456(세조 2년)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 (李甫欽, ?-1457)의 단종 복위 밀모사건으로 1457년 순흥도호부가 폐지되면서 풍기군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고, 이에 순흥 향교가 폐쇄됨에 따라 안향 선생의 영정은 서울의 순흥 안씨 대종가로 옮겨져 봉안되기에 이른다.

이와 관련하여 주세붕 선생은 "공의 영정이 순흥도호부 향교에 봉안되었는데, 정축(丁丑,세조3)의 변고로 순흥부가 없어지자 한성의 대종가로 옮겨 봉안하였다. 내(주세붕)가 공의 종손 안정의 집에서 공의 영정을 본 적이 있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엄연하고 가까이 다가서면 온화하니 진실로 대인군자의 용모로서 생전의 모습을 친히 보는 듯하여 마음속에 길이 간직하고 있었다....." 라고 『회헌선생실기(晦軒先生實記)』에 기록하고 있다.

이후 주세붕 선생은 1544년(중종 38년) 8월 11일 창건된 백운동에 안향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죽계사」3장을 낭독하며 경건히 제례(祭禮)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쪽에 죽계수 서쪽에 소백산 그 사이에 공을 모신 사당

백운이 가득찬 골짜기에 앞 길이 희미하네,

시냇물에는 고기 놀고 산에는 잣나무

여기는 공이 놀던 옛 터인데 어이하여 돌아오지 않으시나,

돌아와 주오 돌아와 주오 나를 슬퍼잖게

서쪽에는 소백산 동쪽에는 죽계수 산 위에는 구름

강물에는 달빛 고금에 변함 없네

공이 오실 적에는 옥규를 타고,

더러는 난조를 타고

나의 술잔을 드시고 나의 정성에 흠향하시어

기쁨을 다하소서.

공이 옛적 낳기 전에 유도가 어두웠고

윤리가 땅에 떨어져 구름 연기에 쌓인 황혼이었네

공이 나신 후로 삼한이 일신되어

푸른 하늘 태양처럼 의리의 도가 높여졌네

훤출한 사당에 공의 영정 봉안되니

죽계수는 더욱 맑고 소백산은 더욱 높아.

 

또한 주세붕 선생은 백성을 위하는 후덕한 목민관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백성들이 나라에 바치는 산삼 때문에 어려움이 많은 것을 알고 소백산에서 산삼종자를 채취하여 인공재배를 장려, 풍기 땅에 재배삼을 처음으로 성공시킨 인물이다.

이러한 주세붕 선생의 선정(善政)을 기리고자 훗날 관아 앞에(현 풍기읍사무소 내) 보기 드물게 선정비를 세웠다.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주옥같은 글을 많이 남겼는데 시가(詩歌) <도동곡(道東曲)> <태평곡(太 平曲)>을 비롯 『죽계지(竹溪誌)』 『무릉잡고(武陵雜稿)』 등을 대표적인 저술로 들 수 있다.(출처 : 소수서원)

 

관련인물

퇴계이황 (退溪 李滉, 1501 ~ 1570)

퇴계 선생은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백운동(白雲洞 ) 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賜額) 받게 하셨고, 이 서원에서 직접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셨다. 또한, 신분과 계급을 떠나 가르침을 원하던 무쇠장이 배순을 제자로 삼아 유교무류(有敎無類)라는 평민교육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또한 주세붕선생이 서원을 세워 안향선생을 높이자, 퇴계는 회헌선생의 수제자인 역동 우탁(易東 禹倬)을 기리고자, 역동서원을 세워 안향선생의 인격과 학풍을 진작시키고 조선 성리학(性理學)을 꽃 피우셨다.

회헌선생의 '유국자 제생문(諭國子諸生文)'을 보고 퇴계는 '유사학 사생문(諭四學師生文)'을 지었으며 안축의 죽계별곡을 보고 '도산12곡'을 남기셨으며,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따 백운동 서원에서 소백산으로 오르며 '죽계9곡'을 명명(命名)했다.

568년 이황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성리학을 강의하고 심법(心法)의 요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성리학자의 도설(圖說)에서 발췌하여 각 도식 아래 자신의 의견을 서술하여 임금에게 강론하였는데, 이것이 성학십도(聖學十圖)이다.

이것을 저술한 이유는 17세의 어린 임금인 선조를 성왕(聖王)으로 인도하려는 데 있었으나, 선조 한 사람만을 위해 지은 것은 아니라 성인을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뜻도 있었다. 이 성학십도(聖學十圖)의 목판본은 소수박물관에 유일하게 남아있다.

성학십도(聖學十圖)

영주는 퇴계가 형인 '온계'와 상봉하던 죽령고개와 처가댁이 있던 푸실(草谷)마을, 외가 동네인 영천고을, 퇴계, 아들, 손자까지 3대가 공부하던 제민루 의국(醫局), 부인 무덤, 무쇠장이 제자 배순 유적 등 퇴계와 관련된 많은 유적지가 전해오는 퇴계학(退溪學)의 시원(始原)이 되는 곳이다.

 

고인도 날 못보고 나도 고인 뵌 일 없네

고인을 못 뵈어도 가시던 길 앞에 있네

가시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쩌리

- 안향 선생을 흠모하여 -

* (출처 : 소수서원)

 

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

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

일신재와 직방재는 원생, 교수와 서원의 임원인 원임들이 생활하던 숙소로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하나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조인데 편액*으로 양자를 구분한다. 앞면 6칸 옆면 1칸 반 크기의 기와집으로, 중앙에 2칸 크기의 마루가 있고 양쪽에 각각 2칸 크기의 방이 있다. 직방재는 건물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있는 방, 일신재는 왼쪽에 있는 방이다.

일신재는 원래 직방재 옆에 딸린 작은 서재로 신방(新房)이라 불리었다. 순조 5년(1805)에 건물을 다시 지으면서 확장하고 일신재란 이름을 붙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일신재의 ‘일신’은 『대학』의 ‘(인격 도야가) 나날이 새로워져라(日日新又日新).’라는 문장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다.

직방재의 ‘직방’은 『주역』의 ‘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서 행동을 가지런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문장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다. (출처 : 문화재청)

* 편액: 종이, 비단, 널빤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

 

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

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

지락재와 학구재는 원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곳이다. 소수서원의 강학공간에 있는 건물로, 2동의 건물이 조금 떨어져 ‘ㄱ’ 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지락재는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기와집이다. 북쪽의 1칸은 온돌방이고 남쪽의 2칸은 마루인데, 온돌방과 접하는 면을 제외한 마루의 3면은 모두 개방된 구조이다. ‘지락’은 송나라 구양수의 글 중 지락막여독서(至樂莫如讀書)에서 따온 이름으로 ‘지극한 즐거움은 독서만 한 것이 없다’란 뜻이다. 높은 곳을 우러러보는 공간이라고 하여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한다.

학구재도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기와집이다. 중앙에 앞뒷면이 개방된 마루가 있고 양쪽에 각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학구’는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한다는 뜻이나, 어린 학생이 생활하는 공간이어서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한다.(출처 : 문화재청)

 

학구재學求齋
지락재至樂齋

 

장서각(藏書閣)

장서각(藏書閣)

서원의 장서각은 나라에서 내려준 책과 서원의 책, 서원에서 출판한 목판*들을 보관했던 곳으로, 현대의 도서관과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소수서원 장서각은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책인 ‘어제내사본(御製內賜本)’을 비롯하여 나라에서 내려준 서책과 각종 책 3,000여 권을 보관했던 건물이다.

장서각은 직방재와 문성공묘 사이에 있는데, 주세붕이 중종 38년(1543) 무렵에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앞면 2칸, 옆면 1칸의 기와집으로, 앞면에는 칸마다 문을 달았고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려고 마루를 깔았다. (출처 : 문화재청)

* 목판(木板): 나무에 글이나 그림 등을 새긴 인쇄용 판

 

정료대庭燎臺 : 횃불을 피워 놓기 위하여 뜰에 세운 기둥 모양의 대(臺)
관세대 : 관세대는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을 수 있도롣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돌
일영대 : 일영대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다.
영정각(影幀閣)

영정각(影幀閣)

영정각은 소수서원에서 보관하는 영정을 모시기 위해 1975년에 지은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의 기와집이다. 조선 시대에는 도동각(道東閣) 또는 영정실(影幀室)이라고 하였으며, 안향의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서원에 영정각을 두는 것이 드문 일이기는 하나 소수서원에는 보물급 영정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영정각을 건립하였다.

영정각 내부의 중앙 좌측에는 주자학의 시조인 주자의 영정, 우측에는 우리나라 주자학의 선구자인 안향의 영정, 왼쪽에는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영정, 능력과 덕망을 겸비한 문신인 한음 이덕형의 영정, 오른쪽에는 청백리의 표상인 오리 이원익의 영정과 조선 후기 사상계를 이끌었던 미수 허목의 영정이 있다. 이 가운데 안향의 영정은 국보 제111호, 주세붕의 영정은 보물 제717호로 지정되었다.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있으며 전시된 영정은 복제본이다.(출처 : 문화재청)

 

숙수사지 출토유물
숙수사지 출토유물
취한대(翠寒臺)

취한대(翠寒臺)

취한대는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한 다음 해인 명종 4년(1549)에 흙과 돌을 쌓아 올려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곳이다. 경자 바위 주변에 터를 잡고 소나무, 잣나무, 대나무를 손수 심고 이름을 취한대로 지었다. ‘취한’은 푸른 연화산의 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으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따 왔다. 취한대는 공부에 지친 원생들이 잠시 휴식하던 곳으로, 현재 이곳에는 1986년에 지은 정자가 있다.(출처 : 문화재청)

   

죽계竹溪

죽계竹溪는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소수서원을 휘감아 흐르는 하천으로, 소수서원의 경관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실제로 죽계는 소수서원에 관한 여러 문헌 기록에서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죽계는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인 안향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 시대 후기의 문신인 안축의 고향이면서 안축이 지은 경기체가* 『죽계별곡』의 무대이기도 하다.

 

'경敬 자' 바위

세조 3년(1457년) 단종복위운동(정축지변)의 실패로 의거에 가담한 순흥관리와 선비들의 집안이 석교리 일대 냇가에서 참살당한 후 밤마다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므로 유생들이 밤 출입을 꺼리자, 주세붕선생이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경(敬)’자 위에 붉은 칠을 하여 제를 드리닌 그때부터 울음이 그치게 되었다고 한다.

 

죽계竹溪
죽계竹溪
죽계竹溪제월교霽月橋비碑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서원은 조선 사회에 성리학*이 정착하면서 사림** 세력이 지방에 설립한 사립 고등교육기관이다. 서원은 성리학을 연구하며 인재를 교육하는 강당이 있는 강학 공간, 존경하는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 있는 제향 공간, 그리고 유생들이 시를 짓고 토론도 벌이며 휴식하고 교류하는 유식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주변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인격을 갈고닦는 인성교육에 중심을 두었다.

조선 시대 서원 중에서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의 9개 서원이 2019년 7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 이들은 한국 서원의 총체적인 특성을 보여 준다.

‘한국의 서원’은 “문화적 전통, 또는 현존하거나 소멸된 문명과 관계되면서 독보적이거나 적어도 특출한 증거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세계유산 등재기준 (ⅲ)을 인정받아 세계유산이 되었다.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에 걸쳐 건립된 이들 서원은 조선 시대 성리학이 교육과 사회 활동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또 이 서원들은 전국 각지의 지식인들이 제향을 올리고 강학을 하여 성리학 교육 체계를 만들고, 그것에 꼭 맞는 건물을 지어, 성리학 가치가 담긴 독특한 역사 전통을 만들어 가는 공간이었다.

 

‘한국의 서원’을 이루는 9개 서원

- 소수서원: 1543년에 최초로 건립. 건물, 공간의 기본 요소와 제향과 강학 관련 규정을 처음으로 수립하여 서원의 기준이 되었다.

- 남계서원: 1552년에 건립. 강학 공간의 뒤에 제향 공간을 배치하고 유식 공간까지 완벽하게 갖춘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 옥산서원: 1572년에 건립. 서원이 교육과 출판·장서의 중심 기구로 기능하게 된 것을 보여주며, 정문에 누마루 건축물을 처음으로 세운 서원이다.

- 도산서원: 1574년에 건립. 사회와 정치에 영향을 많이 미친 서원으로, 서원이 학문과 학파의 중심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 필암서원: 1590년에 건립. 호남지역의 평탄한 지형에 맞추어 강당과 기숙사가 사당을 바라보도록 건물을 배치하여 예의를 표했다.

- 도동서원: 1605년에 건립. 자연과 조화를 이룬 서원의 특징을 대표한다. 비탈진 지형을 이용해서 낙동강을 바라보게 건물을 세운 건축 배치가 탁월하다.

- 병산서원: 1613년에 건립. 만대루는 서원 누마루 건축 형태의 탁월한 사례이며, 서원의 역할이 교육기관에서 여론 수렴지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 무성서원: 1615년에 건립. 지역의 학문 부흥과 성리학 전파에 힘쓴 서원이다. 향약의 바탕이 되었으며 20세기 초 항일 의병의 근거지가 되었다.

- 돈암서원: 1634년에 건립. 성리학의 실천 이론인 예학 논의의 산실이며, 예학을 건축으로 표현한 강학당인 응도당이 탁월하다.

*성리학(性理學): 중국 송나라 때에 주희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 파

**사림(士林): 조선 시대 성리학적 가치를 중시하던 지식인을 일컫는 말

***유식 공간(遊息 空間): 자연 속에서 수양하고 휴식하는 일을 성리학을 배우는 과정의 하나로 보고, 자연과 더불어 수양할 수 있도록 서원 내외부에 조성한 공간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