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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천

영천 청제비와 청못

노촌魯村 2006. 2. 20. 19:19

 

 

 

영천청제비 (永川菁堤碑)

 지정번호 : 보물 제517호(69.11.21)

 시 대 : 신라시대

 소 재 지 : 영천시 도남동 산7-1번지

 소 유 자 : 안용환

 재 료 : 화강석(花崗石)

 규 격 : 제1비-높이 130cm, 넓이 53.5cm. 제2비-높이 107cm, 넓이 77cm

  이 비는 신라시대 청못이라는 저수지 축조와 관련이 있는 양면비(兩面碑)이다. 이 비는 황강암의 자연판석으로 장방향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비면에는 행간이나 윤곽선은 없고 양면을 가공하여 글자를 새겼는데 그 양면의 비문은 각각 다른 연대와 내용을 담고 있다. 비의 앞면에 한 면은 법흥왕 23년(536)에 청못저수지를 축조한 사실을 기념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원성왕 14년(798) 일부 무너진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이 적혀 있다.

  이러한 비문 내용은 신라시대 벼농사 및 수리시설과 관련이 있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 나타난 인명, 관직명, 이두문(吏讀文) 등은 신라시대의 사회사와 언어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한때 세인들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 아래 계곡에 묻혀 있다가 조선 숙종 14년(1688) 위쪽에 새겨진 청제중립비(菁堤重立碑)를 세울 무렵, 다시 정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영천시청 자료에서)

丙辰築堤記

이 丙辰築堤記는 현재 마모와 훼손이 심하여 거의 반 가량의 비문을 판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탁본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글자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丙辰年二月八日□□□大

塢□□□□鄧九十二□□

廣□二□□□將上三將作人

匕千人□二百八十方

使人□□尺□知大舍第

□□小舍第述利大烏第

□□小烏未□小烏一支

□人□□尒利乃利□丁□

使作人只珍巴伊卽刀

衆社村只□□□干支□尒里

貞元十四年修治記

이 貞元十四年修治記는 앞에서 살펴본 丙辰築堤記와는 달리 보존상태가 좋아 해독이 가능하므로 원문 다음과 같다.

貞元十四年戊寅四月十三日菁堤

治記之謂洑堤傷故所內使

以見令賜矣□長州五步岸

立弘至深六步三尺上排掘里

十二步此如爲二月十二日元四月十三

日此間中了治內之都合斧尺

百州六法功夫一万四千百冊人

此中典大ホ角助役切火押梁二

郡各口人尒起使內之

節所內使上干年乃末

史須大舍

加大守須□玉純乃末

永川 菁堤重立碑

菁堤碑의 서쪽으로 약 5m 떨어진 곳에 康熙 27年(肅宗 14年, 1688)에 세워진 菁堤重立碑가 있다.

 

(碑前面) 永之南有菁堤堤之址有碑焉其文

有曰唐貞元十四年戊寅自 上委

遺兩內使用役夫一萬四千八百餘

人築堤立石以記顚末云盖此堤灌

漑三百餘石至今蒙利而往在順治

癸巳碑石爲人所折埋沒塵埃人莫

不惜其古蹟之不傳金玆改立石以

識之噫後之人因是碑而思所以不

廢是堤則碑之於堤不能無助焉

康熙二十七年戊辰九月日

 

(碑後面) 碑首唱

方守悅

崔一奉

林彦良

監考朴生


 

 

 

 

 

 

 

 

용왕이 된 청지

영천에서 경부고속도로로 가다보면 “청지(청못)”라는 큰 저수지기 있는데, 원래 작은 마을이었다고 한다. 장가든지 20년이 넘던 한 5대 독자 집안에 아들이 태어났다. 부모는 하늘이 준 아기라 하여 ‘청지’라 부르며 곱게 길렀는데, 청지의 힘은 상상도 못할 만큼 세었다. ‘청지’가 15살 되던 어느 밤, 한 선녀가 채약산 중턱에 있는 쉰 길 바위를 무너뜨리라고 하며 만약 허물지 않으면 그 바위에 서린 신기에 의해 죽을거라고 했지만 청지는 오히려 크게 끄짓고 쫓아버렸다. 한편, 당나라 궁성의 천자는 동쪽 하늘의 찬란한 빛에 놀라 복술사에게 그 연유를 묻자, 동쪽의 신라에 큰 인물이 나타나 천자에게 위협이 될 거라고 했다. 천자는 당장 그 근원을 없애라 명했고 군대를 이끈 복술사가 마침내 이곳에 도착하자 군사들은 지쳐 있었다. 그 때 쉰 길 바위의 넋이 나타나 청지에게 이길려면 힘보다는 청지를 설득시켜 마을을 옮기고 못을 막으라고 했다. 복술사는 회유와 속임수로 마을 사람과 청지를 설득시켰다. 마침내 못둑이 완성되던 날 갑작스런 뇌성과 폭우로 순식간에 못에 물이 고였고 청지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자 못 때문이라 생각한 사람들이 제를 올렸다. 이 때, 선녀가 나타나 예전의 충고를 들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다며, 청지는 용왕이 되어 물이 마를 때, 동해와 뚫린 길을 찾아 피하면 다시 물이 차니 반드시 그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 후 선녀와 청지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청지가 15세 때 이 못의 용왕이 되었다고하여 못 둘레가 십오리라고 한다..(경상북도:전설과 함께하는 경북관광)

영천청제(永川菁堤.시도기념물  제152호 (영천시).경북 영천시  금호읍 구암리 437-1,437-4 ) 

신라시대에 축조된 수리시설중 현존하며 관개수리시설로 이용되고 있는 못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으로 법흥왕 23년 이전 476년 또는 536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청제 축조시 동원된 인원이 7,000명이라는 것으로 보아 국가적인 차원의 사업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목책이나 말뚝으로 제방을 견고히 보강하는 기술이 사용되었고 나무 수문이 설치되었다고 하므로 청제의 기능을 추정해 볼 수 있고 그 당시 수리시설의 실태 파악이 가능해지며 농업생산성을 추측하여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임 (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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