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7호 통일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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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문화재를 찾아서(진리를 밝히는 등불 석등. 통일신라시대 국가지정) : 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03.jsp
의상과 선묘의 구원의 사랑
귀족 가문으로 호화롭게 성장한 의상조사는 승려로 입문하여 입산수도를 했다. 그 후 서기 650년, 홀로 당나라 양주에 갔을 때 병을 얻어 양주성 수위장인 유지인의 집에서 치료하던 중, 그의 딸 선묘가 사모하게 되었다. 조사는 이를 법대로 대하여 제자로 삼았는데 선묘는 “귀국하실 때 꼭 들러주소서”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쾌히 승낙한 조사는 당나라 서울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에서 수학하던 중, 당이 30만 대군으로 신라를 침법하려는 형세를 알고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조사는 귀로에 선묘의 집에 이르렀으나 마침 출타 중이라 길을 재촉했다. 한편 귀국 선물로 법의를 마련하고 손꼽아 기다리던 중, 그가 다녀 간 것을 알게 된 선묘는 조사를 뒤쫓아 산동성 해안에 다다랐다. 그러나 바다엔 흰 돛만 보일 뿐이었다. 하염없이 바라보던 선묘가 선물을 바다로 던지며 “이 옷이 조사님께 이르게 해 주옵소서”하자, 해풍이 크게 일어 선물이 조사의 배 안으로 들어갔다. 선묘가 다시 “ 이 몸이 용이 되어 조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소서”하며 바다로 몸을 던지니 과연 용이 되어 귀국길을 호위했고, 조사는 무사히 귀국하여 국난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조사는 왕으로부터 사찰 건립의 명을 받고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에 이르렀다. 지세를 살피니 과연 명산이나 이교(異敎) 500여명이 점령하고 막무가내로 자라를 양보해 주지 않았다. 이 때,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법력을 써서 무량수전 서편의 큰 바위를 공중으로 3번 올렸다 내렸다 하니 무리가 겁을 먹고 굴복했다. 이 자리에 건립한 사찰이 부석사이며, 이 때의 큰 바위를 부석(浮石)이라 불렸다. 한편, 선묘룡은 석룡이 되어 무량수전 자리에 안좌되어 부석사의 수호신이 되었다.(경상북도 : 전설과 함께하는 경북관광)
목조건축으로 느끼는 선조들의 숨결(고려시대 목조 건축물-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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