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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성(南山城)에 담긴 신라인의 호국 정신

노촌魯村 2007. 2. 8. 12:39
 

 남산성(南山城)에 담긴 신라인의 호국 정신

                                     

 우리나라는 지형 관계로 옛부터 성곽이 많다. 조선 세종 때 양성지(梁誠之)는 “우리 나라는 성곽(城郭)의 나라”라고 말했고, 중국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은 성(城)을 잘 쌓고 방어를 잘하므로 쳐들어 갈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전국 곳곳에 성터가 남아 있으며 “성(城)”자가 들어가는 지명도 매우 많은 것을 볼수 있다. 이는 높은 산에는 산성이 있고, 야트막한 산에는 토성이 있으며, 평지나 바닷가에는 역사의 이끼가 덮힌 읍성의 성벽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성곽의 유적은 우리 역사 이래 끊임없이 이어진 외적의 침입에 맞서, 이 강토를 수호하려는 우리 조상의 호국 정신의 표상(表像)이라 하겠다.


삼국유사 제1권 위만조선조에


 「누선 장군은 제나라의 병력 7천을 거느리고 왕검성에 이르렀는데 우거는 성을 지키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곧 나아가 공격을 하니 누선의 군사가 패하여 도망을 했다. 양복은 군사을 잃고 산속으로 몸을 피하여 겨우 생명을 부지하였다. 좌장군 순체도 패수 서쪽을 쳤으나 능히 깨뜨리지 못했다.」


라는 기록을 보아 고조선 말기에는 성곽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 신라는 시조 혁거세거서간 21년에 금성을 쌓았다」

「고구려는 시조 동명성왕 4년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였다.」

「백제는 시조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는 기록을 보아, 왕궁이 있는 도읍지에는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도성을 쌓았고, 그 영역의 확장에 따라 성이나 책(柵)을 신축했으며, 삼한의 여러 세력들도 취락 주변에 성을 가지고 있어, 성을 기초 단위로 한 성읍국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인다.

 성곽은 그 쌓은 재료에 따라서 흙으로 쌓은 토성, 돌을 다듬어 쌓은 석성,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토석혼성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위치에 따라 산성, 궁성 또는 왕성, 도성, 읍성, 진성, 장성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신라는 한반도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서남쪽으로 백제, 가야와 국경을 접하게 되고 이들의 도전을 받아야 했으며, 바다 건너 왜의 침공도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동북으로는 동해안을 따라 말갈이 수시로 침범해 왔고, 진평왕 때부터는 남으로 내려오는 고구려의 세력에 맞서 항쟁을 해야 했다. 이러한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신라는 일찍부터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수도 금성은 도성이 별도로 없었고, 대신 동.서.남.북의 높은 산꼭대기에 산성을 축조하였다. 즉 동쪽으로는 명활산성, 서쪽으로는 서형산성과 부산성, 남쪽으로는 남산신성과 고허성, 북쪽으로는 북형산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궁성과 남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남산성을 살펴 보고자 한다.


     남산성지(南山城址) 및 장창지(長倉址)


 해발 468m인 남산(금오산.金鰲山) 꼭대기에서 동남산과 서남산의 분수령을 타고 북쪽인 경주 시가지를 내려다 보면서 1Km 쯤 내려오면 금오정(金鰲亭)이라는 전망대가 있다. 이 금오정은 동쪽으로는 옻밭골과 국사곡이고 서쪽으로는 포석계의 분수령이 되는 아주 전망이 좋은 봉우리이다. 금오정에서 다시 북쪽으로 1Km 정도 내려오면,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주위에 많은 바위들이 얽혀 있는데 동쪽에 있는 높이 3.5m 정도되는 바위와 서쪽에 있는 4.5m 쯤 되는 바위는 멀리서 볼 때 게(蟹)의 눈(目)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옛날 신라부터 이 곳을 해목령(蟹目嶺, 해발 281m)이라 불러왔다고 구전(口傳)되어 온다.

해목령 봉우리는 장창곡, 윤을곡, 탑곡 등의 분수령이 되며 봉우리에 올라서서 보면 북으로 경주 시가지와 반월성이 눈아래 보이고, 동쪽으로는 동해에서 오는 외적에 대비하여 일찍부터 산성이 축조된 명활산과 신라의 진산이요 영산인 낭산, 그리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에 안은 토암산과 그 사이에 들판이 그림처럼 펄처있다. 서쪽으로는 김유신 장군께서 화랑 시절에 수도했다는 단석산과 서산성모의 전설을 간직한 선도산, 그 사이의 모량 골짜기와 경부고속도로가 한 시야에 다보이니 그 옛날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지키기에 알맞은 곳이다. 이 해목령을 중심하여 3.7Km에 이르는 성을 쌓으니, 이 성이 신라 도성의 중심이 되는 남산성이다. 남산성의 내부에 넓은 계곡을 포용하는 포곡형(包谷形)의 산성이다. 성벽에는 문이 있었던 자리가 2군데 있고 성벽에 근접한 곳에는 여러 군데 망대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성안에는 물이 흘러나갈 수 있도록 수구(水口) 시설도 여러 곳에 마련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성벽은 거의 허물어지고 말았으나 간혹 옛 모습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곳도 있다. 가장 잘 남은 있는 곳은 신라 초기의 불상인 감실불상이 있는 불곡 막바지 부근인데 넓적한 자연석을 쌓아올렸다. 성벽 곁에 나타나는 면들은 대략 길이 60cm, 높이 30cm의 크기로 곱게 다듬어서 쌓았으므로 곁에서 볼 때에는 벽돌로 쌓은 성처럼 보이고 성벽의 높이는 약 2m정도로 추정된다.

 특히 남산성은 왕성인 월성을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어 외적이 침입이 있을 때,높은 봉우리 마다 마련되어 있는 봉수대를 통하여 봉화와 연기 등의 신호로하여 북형산성, 선도산성, 명활산성에 전해지면,그 정보를 남산성이 받아 월성에 전하고, 월성의 명령을 남산성이 먼저 받아 명활산성,선도산성,북형산성으로 전하면, 다시 이 곳에서 각처로 전해졌을 것이니 남산성은 신라 국방의 중심지 되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이러한 남산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명백하지 않으며 사적(史籍)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 :「신월성(新月城) 남(南)에 남산성(南山城)이 있는데 주(周) 이천팔백사 보(步)...」

 삼국사기 본기 : 「진평왕 13년 추(秋) 7월 남산성을 축조했는데 주(周) 이천팔백오십사 보(步)...」

 삼국사기 본기 : 「문무왕 3년 정월에 남산신성(南山新城)에 장창(長倉)을 축조했다.」

 삼국사기 본기 : 「문무왕 19년 남산성을 증축(增築)하였다」

 여지승람(與地勝覽) : 「남산성은 토축(土築)이고 주(周) 칠천오백사십사 척(尺)...」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法敏條) : 「왕(문무왕을 가리킴)은 처음 왕위에 오르자 남산에 장창(長倉)을 설치(設置)하였는데, 길이가 50보(步), 너비가 15보(步)였으며, 곡식과 병기를 쌓아 두었다. 이것이 우창(右倉)이다. 천은사의 서북 산위에 있는 것은 좌창(左倉)이다.(천은사 서북쪽에 좌창이 있다는 기록은 천은사의 동남산 위에 좌창이 있다는 말이 잘못 기록된 것으로 추정됨) 그리고 딴 책에서는 건복(建福) 8년 신해(申亥, 서기 591년)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이천팔백오심보(步)라 했다. 이것은 진덕왕(眞德王,眞平王의 잘못이라 추정) 때에 처음 쌓았던 것이니, 그렇다면 이 때에 와서 다시 수리했을 것이다. 또 처음으로 부산성(富山城)을 쌓았는데, 3년만에 역사(役事)를 마쳤으며, 안북하(安北河)의 가에 철성(鐵城)을 쌓았다. 또한 서울에 성곽을 쌓으려하여 이미 임원을 갖추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때 의상법사가 이 말을 듣고 글을 보내서 아뢰었다.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시면, 비록 풀 언덕에 땅을 그어서 성이라 해도 백성이 감히 넘어오지 못할 것이며, 재앙을 씻어 버리고 복을 오게 할 수는 있겠지마는 정치와 교화가 진실로 밝지 못하면 비록 만리장성이 있드라도 재해(災害)를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왕은 이에 그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남산성의 중요 기능이 군량미(軍糧米)와 병기(兵器)의 비축(備蓄)에 있었음을 더욱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나 사서(史書)에 명시되지 않은 것은 남산성의 축조 연대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남산성 축조의 시초(始初)가 진평왕 13년이다. 그러나 남산성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료(史料)가 될 수 있는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에 의하면 진평왕 13년에 축조된 성은 신성(新城)이다. 이것은 진평왕 13년 이전에  어떤 형태이던 간에 이미 남산성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남산성안에는 문무왕 3년(663)에 지었다고 추정되는 큰 창고터가 3군데 남아 있는데, 장창지라고 한다. 장창(長倉)이란 큰 창고라는 뜻이다. 북문터 가까이에 중창지가 있고 동쪽에는 우창지, 서쪽에는 좌창지가 있었으니, 좌.우창고는 칼,활,창 등의 병기를 보관하던 병기 창고였고, 중창은 군량미를 보관하던 곡식 창고로 짐작된다. 그리고 진평왕 13년(591)에 남산신성(南山新城)을 쌓을 때 공사에 참가한 사람의 이름과 담당거리와 성을 쌓고 난 후 3년 이내에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벌을 받겠다는 맹세를 적은 비석이 남산신성비이다. 이는 신라인의 강열한 책임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비석은 1934년 처음 발견 이후 9개 인데 주내용은 동일하고 인명은 다르다. 1개의 집단이 성을 쌓은 거리와 전체의 거리를 대비하여 보면 적어도 200여개의 비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남산신성을 쌓을 때의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한 비석으로, 신라 중고기의 지방 통치 체제와 역력 동원 체제 및 지방민의 신분 구성, 촌락민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남산신성비 각각의 비석 크기는 일정하지 않고 재료는 자연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비문은 고졸한 서체로 음각하였고 행의 수와 글자 수는 일정하지 않다.

비문은 건립 연월일과 서약문,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직명, 출신지, 이름, 관등명, 공사 담당 거리 순서로 기재되어 있다.


 제1 남산신성비(번호는 비석이 발견된 순서임)의 내용

    비석의 크기 : 높이 88cm, 너비 약42cm,  두께 약11cm

    글자 : 한줄에 20자 씩 아홉 줄

『 신해년 (진평왕 13년 A.D 591) 2월 26일 우리들은 남산에 신성을 쌓는 일을 맡았는데 정해진 법대로 어김없이 쌓을 것을 맹세한다. 만일 완성된 날부터 3년 이내에 무너졌을 때에는 우리들은 하늘로부터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서약하는 글을 새기고 감독 지휘자들과 동원된 마을의 대표자들과 목수, 석공들의 계급과 직책이 새겨져 있는데 모두 15명이 기록되어있다. 감독 지휘자 세 사람은 대사(大舍; 17등급 중에 12등급)급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지방직과 기술자들이다. 이 비석에 적힌 15명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11보 3척 8촌 길이의 성벽을 쌓았는데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5.52m 정도가 된다.


     우창지(右倉址, 동창)


 해목령에서 큰골과 탑곡의 분수령을 타고 북쪽으로 600m 쯤 내려오면 불곡 막바지에서 산맥은 세 갈래로 갈아지며 큰 산어덕을 이른다. 이 세 갈래의 언덕 위에 각각 창고터(倉址)가 있으니  동쪽의 것은 우창(右倉,동창)이고, 서쪽의 것은 좌창(左倉,서창)이다. 가운데 것은 중창(中倉)이다. 

 우창터는 남산성 동쪽 모퉁이에 자리잡고 서쪽으로 향해서 세워진 건물이며, 주춧돌의 간격과 크기로 보아 50m×17m로 약 250평 정도이다. 터 가운데 길이가 6m이고 너비가 5m, 높이가 약 1m 정도되는 바위와 다섯 개의 기둥 자리와 두 곳의 부틀(널판 밑에 가로 놓은 굵은 나무)이 놓였던 홈이 패어져 있는 큰 돌이 중간에 놓여 있어 약 1.5m 정도의 높이로 널마루를 깔고 그 위에 세운 다락집 형태의 창고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습기로부터 무기의 녹을 방지하기 위하여 창고 밑으로 바람이 통하록 한 신라인의 슬기로운 지혜로 생각된다.


     중창지(中倉址)


 좌창지에서 약 100m 서쪽에 절골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평평한 언덕 위에 동서로 가로 놓인 큰 터가 있다. 좌창지보다 약간 낮은 지대이다.  107m×23m로 약 745평 정도의 창고이며 서쪽 부근의 비탈에 탄화(炭化)된 쌀과 보리들이 많이 발견된다. 이를 미루어 보아 군량미를 저장했던 창고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중창은 약 4천톤의 미곡를 보관할 수 있고, 일만 명의 군사가 500일 정도 먹을 수 있는 거대한 식량의 창고이었다.

 서쪽면에 약간의 축대가 남아있어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고, 2.25m 간격으로 길이 1.45m 되는 긴 돌못을 볼 수 있다. 이 돌못은 축대를 무너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이러한 석축법은 더욱 발전하여 감은사와 불국사의 축대로 발전하였고, 마침내는 석굴암의 아아치형(型) 천정에 사용되어 교묘하게 쌓여진 석재(石材)에 의해 실로 아름다운 조화와 기교의 묘미(妙味)을 나타내고, 성덕왕 이후에는 왕릉에도 이용되어 신라 석축(石築)의 예술로 화려하게 꽃피웠던 것이다.


 

     좌창지(左倉址, 서창)


 중창지의 서남쪽에 우뚝솟은 봉우리에 있다. 45m×15m로 약 200평 규모의 창고이다. 우뚝솟은 봉우리에 건축된 이 좌창은 신라의 국력을 과시하는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우창과 같이 병기의 창고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 본기 권 제9 혜공왕 4년조에 의하면


 「가을 7월에 일길찬 대공이 그의 아우인 아찬 대렴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지어 33일간 왕궁을 둘러 �더니 왕의 군사가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고 9족을 다 죽였다.」


 삼국유사 권2 혜공왕조의 기록을 보면


 「7월 3일 각간 대공이 적도가 되어서 일어나고 왕도와 5도주군의 96각간이 서로 싸워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 대공 각간이 죽고 그 집안이 망하니 그의 재산과 보물 등을 왕궁으로 옮겼다. 신성의 장창이 불에 타므로 사량,모량 등의 마을 안에 있던 역당들의 재물과 곡식들을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난리는 석달 만에 그쳤는데 상 받은 사람도 많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위의 두 기록에 의하면 남산성의 장창이 혜공왕 4년(768)에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인이나 가정 또는 국가가 그 구성원들이 유비무환의 정신이 강하였을 때는 그 집단이 크게 융성하고 어떤 위기에서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유비무환의 정신이 해이해지면 조그만한 위기에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맺는말


 우리에게는 조상이 물려 준 수많은 유산이 있다.  그 유물 유적들 중에는 우리 나라의 성곽은 그 하나하나가 역사의 매듭이요,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이다.

 유난히 외침이 많았던 우리의 역사 속에서 외적을 막아 우리의 아름다운 강토를 보존하려 했던 조상들의 호국의지(護國意志)를 느낄 수 있고,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도 되새기여 볼 수 있다.

 인구가 많지않아 노동력이 적었고, 특별한 장비가 없었던 그 시대에 대규모의 성을 쌓는다는 것은 엄청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산성을 쌓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피눈물과 땀의 결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산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허물어진 성벽의 돌덩이 하나,  기와 한 조각에서도 조상들의 호국의지와 국토수호(國土守護)에 대한 무언(無言)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특히 신라 도성 수비를 완벽하게 해 주는 역할한 남산성에서는 축성 공사가 끝난 뒤 돌에다 책임을 다한다는 맹세의 말을 새기어, 축성 공사에 종사한 사람이 성을 축조하는 강한 책임감과 투철한 사명 의식의 마음 가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병기 창고와 군량미 창고가 견고하였다는 것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주춧돌과 축대를 보면 짐작 할 수 있고, 그 위치와 저장 방법에서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건축하였는지 실감할 수 있고, 신라인의 국가 위기에 대한 준비심을 읽을 수 있다.

 허물어진 성벽의 돌 하나가 우리에게는 귀중한 유적이요, 위대한 조상의 정신이 담긴 문화재라는 점을 인식하여 보존하는 마음을 길러야 하겠다.


    ◇ 參考文獻 ◇

  

   三國遺事 (崔南善 編)

   三國史記 (金鍾權 編)

   新增東國輿地勝覽 (古典國譯叢書)

   윤경렬, 『겨례의 땅  부처님의 땅』, 불지사,1993

   韓國佛敎硏究院 著, 『新羅의 廢寺 Ⅱ』, 一志社, 1974)

   반영환, 『한국의 성곽』, 대원사, 1991

   국립경주박물관, 『特別展 慶州 南山』,1995

   慶州市, 『新羅의 빛』,

   慶州市, 『慶州南山古蹟 巡禮』,1979

   朝鮮總督府, 『慶州南山의 佛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