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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陁羅尼經)⌋과 우리의 의무

노촌魯村 2007. 1. 30. 08:57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陁羅尼經)⌋과 우리의 의무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陁羅尼經)⌋!
‘한없이 맑고 깨끗하며 영롱한 빛을 발하여 감히 그 어떤 때(垢)조차 낄 수 없는 위대한  다라니(주문; 呪文)들이 수록되어 있는 경전’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경⌋으로 약칭함)⌋은 1966년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찰인 경주 불국사(佛國寺) 석가탑(釋迦塔)의 2층 탑신(塔身)부 사리공(舍利孔) 속에서 발견되자마자 ‘현존하는 세계최고(世界最古)의 인쇄도서(印刷圖書)’로 신문지상에 대서특필(大書特筆)됨으로써 국가적인 이목(耳目)을 끌었고, 1972년 유네스코(UNESCO)가 정한 “세계도서의 해”를 기념하는 간행물인 ⌈유네스코 꾸리에(The UNESCO Courier(1972.12)⌋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世界最古)의 인쇄문헌(THE WORLD'S OLDEST PRINTED DOCUMENT)’로 소개됨으로써 세계적으로 알려진 바 있다. 
이 ⌈무구정경⌋은 세로크기[紙幅] 6.65(6.5-6.7)cm, 상하단변(上下單邊) 5.3-5.5cm, 자경(字徑) 약 4-5㎜, 각 행(行)의 행자수 7-9자, 가로크기 각 53~56.6㎝의 닥종이(楮紙) 12장(張)을 이어 붙인 권자본(卷子本; 두루마리 책)으로서, 그 총길이가 642cm나 되는 소형(小形) 목판(木板)인쇄도서로 판명되었다. 발견 당시 종이는 비와 습기(雨濕)로 부식(腐蝕)되어 부스러져서, 책머리의 제목인 권수제(卷首題)는 ‘--尼經’라는 마지막 2글자만 남아 있고, 그 번역자의 이름(漢譯者名)과 본문 11행을 잃었으며, 또 본문의 시작부분에서 약 250cm까지는 같은 간격으로 1-2행씩 결실(缺失)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조각으로 분리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무구정경⌋은 그 안쪽(內層)으로 들어갈수록 완전한 부분이 전개되어, 권말에는 책의 끝제목으로 “無垢淨光大陁羅尼經”이라는 1행의 권미제(卷尾題)가 인쇄되어 있다. 본문 및 권미제의 글씨체는 해서체(楷書體)이며, 권축(卷軸)은 목심(木心)인데 그 양 끝에는 옻칠(朱漆)이 되어 있다. 1967년에 이 ⌈무구정경⌋을 비롯하여 석가탑에서 발견된 27종(種)의 보물들은 ‘국보(國寶) 제126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무구정경⌋은 서기 704년에 서역(西域)의 미타산(彌陀山)에 의하여 번역되었다. 즉, 이 경을 당시의 중국어로 번역한 미타산은 서역 도화라국(覩貨羅國) 출신이며, 당언(唐言: 漢譯名)은 ‘寂友’(적우)이다. 그는 소년기에 출가한 후, 인도의 여러 지역(五印度)를 옮겨 다니면서 경론(經論)들을 두루 익혔으며, 특히 ‘능가[楞伽經]⋅구사[俱舍論]’에 정통하였다. 미타산이 중국으로 건너온 이후에는 주로 690-704년경에 장안(長安)에서 번역활동을 하였으며, 7세기 말기에는 역경가(譯經家)로 유명한 실차난타(實叉難陀: 652-710)와 함께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을 번역하였다. 그는 또한 ⌈대승입능가경⌋의 번역이 끝난 직후인 ‘天后末年(측천무후의 末年: 長安4年: 서기 704년)’에 법장(賢首法藏)과 함께 ⌈무구정경⌋을 번역하였다.
⌈무구정경⌋의 내용에 대한 개요(槪要)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무구정경⌋의 서분(序分)의 내용은, 외도(外道)를 신봉하고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카필라전다(劫比羅戰茶)라는 바라문(婆羅門)이 7일 후면 자신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어느 상사(相師)의 말을 듣고 너무나 놀라 석가모니(釋迦牟尼; Buddha; 붇다)를 찾아와 설법을 듣게 된다. 
둘째, ⌈무구정경⌋의 정종분(正宗分)에서는, 붇다 역시 ‘이 바라문은 7일 후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 이후의 윤회에 대한 내용들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이에 더욱 놀란 바라문이 붇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에 붇다는 그 바라문에게, 카필라성(迦毘羅城)의 삼거리에 여래의 사리(舍利)가 있는 오래된 불탑을 중수하면서 상륜당(相輪橖)을 만들고, 그 속에 다라니(陁羅尼)를 써넣고 성대한 공양을 베풀며, 법에 의지하여 다라니를 일곱 번 외우라고 한다. 그리하면 당사자의 수명이 장수하고, 또 사후에는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오랫동안 복락을 누릴 것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불탑과 관련하여 치병(治病)⋅장수(長壽)의 방편으로써 고탑(古塔)을 중수하거나 소니탑(小泥塔)을 만들고, 법대로 다라니를 써넣고 또 다라니로 단(壇)을 모으면, 그 복으로 삼악도의 업보까지 면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 등, 매우 현세이익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 모임 중(會中)의 제개장보살(除蓋障菩薩)이 그 다라니법 듣기를 요청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6종의 다라니가 설하여 진다. 즉, ①근본다라니(根本陁羅尼), ②상륜당다라니(相輪橖陁羅尼), ③수조불탑다라니(修造佛塔陁羅尼), ④자심인다라니(自心印陁羅尼), ⑤공덕취다라니(功德聚陁羅尼) 및 육바라밀다라니(六波羅蜜陁羅尼)가 각각 설하여 진다.
셋째, ⌈무구정경⌋의 유통분(流通分)에서는 붇다가 마지막으로 이들 다라니들을 제개장보살⋅집금강주보살(執金剛主菩薩)⋅사천왕(四天王)⋅제석(帝釋)⋅범천(梵天) 등에게 부촉하고, 또 회중의 모든 대중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를 봉행하게 하는 것으로 그 대단원이 마감된다.
위와 같이 ⌈무구정경⌋은 중생들의 병과 재앙을 없애주어 수명을 장수하게 하고, 악업을 소멸시켜 주며, 모든 소원을 성취시켜 주면서, 죽어서는 극락왕생을 보장하여 주는 엄청난 위력을 지닌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조건으로써, 이 경에서 제시하는 근본다라니 등 6종의 다라니를 77회 또는 99회 되풀이하여 필사(筆寫)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보수전

석가탑금동제사리외함

 

석가탑 이층 탑신사리공

 

이러한 ⌈무구정경⌋이 발견되자, ‘이 경전이 언제 간행된 것인가?’에 대하여, 이홍직 교수를 비롯한 10여인의 학자들이 지속적으로 활발한 연구를 펼쳤다. 각 연구의 결과는 조금씩 다르지만, ‘이 경이 중국에서 번역된 704년 이후부터 불국사가 창건된 751년 이전에 간행되었으리라’는 점에는 이견(異見)이 없었다. 그러다가 1994년에 청주대학교 김성수 교수에 의하여,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경⌋은 유네스코 “세계의 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지정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에 중국은 ‘세계의 근대문명을 일으킨 중국의 4대발명품(四大發明品; 화약⋅인쇄술⋅나침반⋅종이)’ 중의 하나를 한국에 빼앗길 것이라는 우려에서, 중국 당국은 1996년에 <중국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과 <북경시 문물국>이 연합하여 중국 전역의 관련 연구자들을 모아 대규모 회의를 개최하고, 노⋅장⋅청년(老壯靑年) 학자들과 전문가들로 하여금 “특별대책반(特別對策班)”을 구성하여 그 대책수립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판지싱(潘吉星)을 비롯한 중국의 고고(考古)⋅문물(文物)⋅인쇄학자들은, ‘불국사 석가탑 발견 ⌈무구정경⌋은 701년에 중국에서 번역되고 702년에 낙양(洛陽)에서 인쇄되었으며, 이 인쇄된 경전이 신라에 전래되어 석가탑 속에 납입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리하여 석가탑에서 발견된 현존하는 세계최고(世界最古)의 인쇄도서인 ⌈무구정경⌋을 놓고 한국과 중국 사이에 이른바 문화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위 중국측의 주장에는 하자(瑕疵)가 있다.
왜냐하면 첫째, 신뢰성이 있는 불전목록(佛典目錄)인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서는 위 ⌈무구정경⌋의 번역년도를 ‘천후말년(天后末年; 서기 704년)’이라고 분명하게 기입(記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경⌋이 702년에 중국 낙양에서 인쇄되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측의 견해는 억측(臆測)에 불과하다.
둘째, ⌈무구정경⌋ 본문 및 권미제에 인쇄된 글씨체(書體; 筆法; 書法)를 관찰하여 보면, 중국 5세기말 6세기초인 용문조상기(龍門造像記) 등의 북위(北魏)시대의 해서체와 유사(類似)하다. 한편 ⌈무구정경⌋이 번역된 8세기초 당시(當時) 중국의 서체는 유려(流麗)한 당나라의 구양순(歐陽詢)⋅우세남(虞世南) 등이 서체가 유행하고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석가탑 발견 ⌈무구정경⌋이 만약 중국에서 인쇄되었다면, 당연히 8세기초 당시에 유행하였던 사경필법(寫經筆法)인 구양순 등의 서법으로 인쇄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반면에 ⌈무구정경⌋의 서체는 신라시대 6세기의 <울진 봉평비>나 영일 <냉수리 신라비>의 서법과 흡사하다. 따라서 ⌈무구정경⌋의 서체는 신라의 전통서법(書法)을 계승⋅발전시킨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
셋째, ⌈무구정경⌋을 인쇄한 종이는 우리의 전통한지(韓紙)인 닥종이이다. 반면에 중국의 전통종이는 그 대부분이 마(麻)를 재료로 한 마지(麻紙)였을 뿐만 아니라 전통종이 그 자체를 ‘마지(麻紙)’라고 명명하고 있다. 게다가 ⌈무구정경⌋을 인쇄한 종이는 755년에 신라에서 사경(寫經)된 ⌈백지묵서화엄경(白紙墨書華嚴經)⌋의 종이와 유사하다.

구황리 삼층석탑(황복사지 삼층석탑)

 넷째, ⌈무구정경⌋ 권미제의 필법은, 경주 낭산(狼山) 동쪽 골짜기에 있는 <구황리 삼층석탑(황복사지(皇福寺址)석탑)>에 발굴된 사리함(서기 706년에 납탑공양(納塔供養)됨)의 뚜껑 안쪽(開部內面)에 새겨진 명문(銘文)의 필법(筆法)과 동일(同一)하다. 실제로 ⌈무구정경⌋의 권미제와 위 명문 탁본(拓本)을 각각 스캔(scan)하여 그 필적(筆跡)을 서로 대조하여 감정(鑑定)한 결과, 동일인의 필적임이 판명(判明)되었다. 이는 ⌈무구정경⌋의 목판 간각(刊刻)을 위한 저본(底本; 판하본(板下本))을 서사(書寫)한 시기가 바로 706년경이었을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示唆)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네 가지 측면만 보더라도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경⌋은 우리 한국의 위대한 문화유산임을 명백하게 증명할 수 있다.
더구나 신라인들은 이 ⌈무구정경⌋의 위력을 재빠르게 간파하고 이를 곧바로 실천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구정경⌋이 704년에 중국 장안(長安; 西安)에서 번역되자 불과 그 2년 뒤인 706년(5월 30일)에, 신라의 진산(鎭山)이며 성스러운 산으로 추앙된 경주 낭산(狼山)에 있는 신라왕실의 원찰(願刹) 황복사(皇福寺)의 삼층석탑에 성덕왕(聖德王; 702-737 재위)은 그의 아버지인 신문왕(神文王; 681-692 在位)과 어머니 신목태후(神穆太后) 및 그 형인 효소왕(孝昭王; 692-702 재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이 ⌈무구정경⌋ 1권을 곧바로 납탑공양(納塔供養)하고, 그 외함(사리함)의 사면에 ⌈무구정경⌋의 내용과 같이 99기(基)의 소탑(小塔)을 점선으로 새겼던 것이다. 이 사리함과 내용물은 바로 ⌈무구정경⌋에 의거하여 장치된 것임을 여실히 증명하여 준다.

나원리오층석탑

 

게다가 1996년 3월에 경주 <나원리석탑(국보 제39호)> 속에서 발굴된 사리함의 안쪽 벽면에 부착된 상태로 발견된 지편(紙片)의 묵서(墨書)는 ⌈무구정경⌋의 ‘자심인다라니’와 ‘대공덕취다라니’의 일부임이 판명되었다. 고고미술사학계에서는 이 석탑과 사리함 속의 불상(佛像)은 ‘서기 7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이라고 논술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발견된 ⌈무구정경⌋의 다라니는, 석가탑에서 발견된 인쇄본 ⌈무구정경⌋의 간행과도 상당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95년 8월에 <화엄사 서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종이뭉치들은 ⌈무구정경⌋에 내재된 다라니들을 수십 차례씩 되풀이하여 서사(書寫)한 것이다. 그밖에 ⌈무구정경⌋의 조탑(造塔)사상에 의하여 세워진 탑들과 사리함 등은, <창림사지 무구정탑><황룡사 구층목탑><산청 석남사지 영태2년명><해인사 길상탑> 등 20여개의 기록과 탑 등이 있다.
인쇄의 기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대량으로 그 지식정보를 전파할 수 있는 막강한 위력을 가진 수단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목판인쇄술은 인쇄술의 최초의 형태로써, 나무판에 글자와 그림을 새기는데 시간이 무척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들지만, 일단 그 내용을 정확하게 한 번 새겨 놓기만 하면, 그 판을 오래 간직하면서 해당 목판이 마멸될 때까지 수시로 찍어 널리 보급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무구정경⌋에서는 그 속에 내재된 6종의 다라니를 77번 혹은 99번 되풀이 하여 서사(書寫)하여야만 비로소 그 공덕(功德)이 발현된다고 설(說)하고 있다. 704년 이후 중국에서 ⌈무구정경⌋이 신라에 수입되었을 때, 이 경에 내재(內在)된 각종 다라니를 77회 또는 99회씩 반드시 되풀이 하여 필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 필경사(筆經師)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8세기 신라의 정황(情況)을 미루어 볼 때, 신라인들은 탑인(塔印)이나 인장(印章; 圖章) 등의 방법을 응용하여 ⌈무구정경⌋을 다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목판인쇄의 방법을 자연스럽게 발상(發想)하고 이를 강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경⌋ 권미제의 글씨체가 황복사지석탑 사리함 명문의 그것과 동일한 것을 보면, 706년에 황복사지석탑 사리함의 명문을 쓴 전문가가 석가탑 발견 ⌈무구정경⌋ 목판간행의 총감독(사경(寫經)의 경제필사(經題筆師)에 해당함)의 직책을 맡아 드디어 (목판)인쇄도서를 간행하는 대업(大業)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경⌋은 706-751년 사이에 신라의 경주에서 간행된 현존하는 세계최고(世界最古)의 인쇄도서임에 틀림이 없고, 이것은 반드시 유네스코의 “세계의 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지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한국의 위대한 선조(先祖)들이 이룩한 찬란한 문화유산을 이 새천년에서도 계승⋅발전시켜야 하는 의무와 권리가 우리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명심(銘心)하여야 할 것이다.  

 

불국사 석가탑(불국사 삼층석탑)

 

석가탑 금동제 사리함

 

 석가탑 동경 및 옥류

 

 

 

*2007년 3월 28일 법보신문 기사 중 일부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서 국립박물관 측은 무구정광다라니경의 연대 문제에 대해 8세기 신라에서 제작한 것이 확실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국립박물관은 △무구정광다라니경에 측천무후자가 10차례에 걸쳐 사용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던 무구정광다라니경이 들어있었고, △서체 또한 황복사 3층석탑 사리함 명문과 유사한 신라 특유의 서체이며, △중국 고대 경전에 사용된 마로 된 종이가 아니라 닥종이인 만큼 “무구정광다라니경은 신라종이에 쓰여진 신라 글씨가 확실하다”고 밝혔다.

또 “중수기 상에 보이는 무구정광다리니경의 의미는 통일신라시기에 봉안한 경전을 재안장했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크며, 보협인다라니경이 사리기 외부에서 발견된 것과 달리 무구정광다라니경은 사리기 내부에 안치됐다”고 밝혔다.

또 최근 제기된 또 하나의 무구정광다라니경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직물에 싸인 지류뭉치가 금동제 사리기 외부에서 발견돼 1988년 응급조치 후 밀봉시켰으며 무구정광다라니경의 경우와 달리 목제 축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