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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佛像)의 탄생

노촌魯村 2007. 2. 5. 14:30
 

           불상(佛像)의 탄생


 부처님상은 부처님 당시부터 기원전까지는 일체 조성되지 못하다가 서력기원 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말하자면 부처님이 가비라성에서 탄생하신   지 반천년(5000년)이 경과된 이후에야 비로소 부처님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부처님의 상이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이 부처님상의 출현은 부처님의 탄생만큼이나 획기적인 변모를 일으킨다. 대승불교의 급속한 유행과 불교도들의 의식의 변화 등 걷잡을 수 없는 대변혁을 당시 사회에 몰아왔던 것이다.


 1. 불상없던 시대(無佛像時代)의 부처님의 상징


 불전의 전설로 보면 불상은 부처님 시대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은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믿어지므로 실제의 불상의 제작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휠신 뒤의 일인 것만은 거의 확실할 것이다. 그 시기는 대체적으로 서력기원을 전후한 때로 흔히 추정하고 있다. 그러면 불멸(佛滅) 후 약 500여년 간은 도대체 무엇을 신봉하였을까.

 불교는 원래 우상(偶像)을 부정하는 종교이다. 오직 정신의 조화와 통일을 통하여 영원한 깨달음의 길, 즉 열반에로 이르기를 가르치는 종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가시적이고 일시적인 형상을 부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형상이 정신을 통일하는 데는 하등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율장(律藏)에서 부처님의 형상의 제작을 일체 금지시켰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잘 알려주는 것이라 하�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 이러한 엄격한 계율은 새로운 생각을 가잔 사람들 때문에 부정되고 만다. 불교도는 엄격히 4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출가한 남승(男僧)인 비구(比丘), 여승(女僧)인 비구니(比丘尼), 가정에 있는(在家) 신남(信男)인 우바이, 신여(信女)인 우바새이다. 이 가운데 재가신남.신여(在家信男.信女)들은 대개 높은 종교적인 감응력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교의 깨달음의 길을 쉽게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즉 부처님의 추상적인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어떤 형상을 통해서 그러한 가르침의 실재성을 확인하는 것이 보다 급선무였던 모양이다. 세존의 입멸 후에 여러 나라 왕들이 서로 사리(舍利)를 차지하려던 유명한 사리분쟁사건이 일어난 사실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결국 어떤 바라문의 중재로 여덟 나라에 공평하게 나누어 각기 탑을 세워 모셨으니 바로 이것이 유명한 [사리팔분(舍利八分)에 의한 근본사리팔탑(根本舍利八塔)]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보다시피 탑 조성의 주동자는 재속신자(在俗信者)들이다. 그들은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탑이라는 형상을 통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인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전국적인 전파에 따라 추상적인 부처님 말씀만으로는 그 말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아졌다. 이들에게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형상으로 그러한 가르침을 알려주어야만 어느 정도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원의 건물에 따라 거기에 알맞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조각으로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那耶雜事) 제17(新修大藏經 p.283) 등에 보이다시피 문에는 집장야차(執杖夜叉), 처마에는 본생사(本生事), 강당에는 설법장면, 식당에는 음식가진 야차, 창고에는 보배가진 야차, 병실에는 여래(如來)가 병 구완하는 모습, 방 안에는 해골 등을 그린다는 말에서 이 점을 십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으로도 만들었다. 고대 조각으로 유명한 탑(塔)의 난간이나 문에는 부처님의 일대기나 전생(前生)의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을 부조(浮彫)로 새겼다. 가령 부처님이 어느 전생 때 어느 나라의 태자로 있었는데 새끼를 거느린 어미호랑이가 굶어 죽게 된 것을 보고 스스로 몸을 던져 호랑이의 밥이 되어 어미와 새끼를 구했는데 이런 공덕으로 현재 부처님이 되었다는 등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극적으로 묘사한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불교의 근본 교리인 인연설(因緣說)들을 누구나 다 알아듣도록 이해하기 쉬운 설화형식(說話形式)으로 엮은 것인데, 이러한 쉬운 이야기들을 시각적으로 형상화시킴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다 크게 감동받게끔 한 것이 말하자면 탑의 부조둘인 것이다. 이들 조각에는 보통 석가부처님은 새기지 않은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다. 부처님이 들어가야 할 공간에는 깨닫는 장면일 경우에는 부처님이 깨닫던 때에 보리수나무 밑의 금강보좌(金剛寶座)에 앉아 있었으므로 보리수나 금강보좌를 표현하였고, 설법하는 광경일 때는 법륜(法輪)을 나타내었으며, 전도하러 다니는 부처님을 표현했을 때는 발바닥(佛足跡)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조각으로 표현된 형상이 성스런 예배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교재로서 보다 더 중요시하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 형상은 점점 인간을 감동시켰으므로 어느덧 형상을 신성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게 되었다. 단순한 교훈 이상의 종교적인 깊은 감명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형상은 이제 신성한 숭배의 대상이 된 셈이다. 가시적인 형상에는 그 나름의 어떤 성격, 즉 덕을 갖고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곧 부처님도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게끔 유도하기에 이르렀지 않았나 한다,. 그래서 불전도(佛傳圖)들에 불상이 표현되었고, 드디어는 순전히 예배용의 불상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2. 불상의 창시(創始)


 앞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예배 대상으로서의 불상은 교훈적인 교재로서의 오랜 전통에서 스스로 만들어진 산물(産物)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교재로서의 형상이 인간들을 크게 감동시켰으므로 점차 숭배의 대상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불상의 출현은 쿠샨왕조시대에 그리이스.로마(헬레니즘) 계통의 신상(神像)의 영향으로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인도 재래의 신상에서 발전된 때문이라고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교 재래의 불전도 같은 형상에서 발전되었음이 분명하고, 외국이나 기타 인도 신상 조형의 영향은 부분적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계기를 마련해 준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불상은 어쨌던 앞의 두 가지의 이유로 해서 두 지역에서 발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두 지역인 간다라와 마투라를 나누어 초기 불상의 출현 사정을 간략히 살펴 보기로 하겠다.


  1) 간다라 지방의 불상 발생

 간다라(Gadhara) 지방은 인도의 서북지방으로 넓게 잡아서,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쪽으로는 펀잡(Punjab)에 이르는 지역을 말하고 있다. 이곳은 서쪽의 유럽 지역인 그리이스나 로마는 물론 중근동(中近東)의 문화가 들어오고, 또한 동쪽의 인도 중부는 물론 멀리 중국이나 서역 등의 문화도 들어오는 등 동서문화가 활발히 교류.접촉하던 요충 지대로서 학술이나 예술이 고도로 발달했던 곳이다.

 이른바 간다라 미술로 알려진 미술은 바로 이 지역에서 일어난 가장 찬란한 미술을 말하고 있다. 특히 서력 기원 1세기 중엽에 이 지역을 침입한 쿠샨족이 세워던 쿠샨왕조(Kusana;기원 후 1세기 중엽에서 220년) 시대에 만들어진 불교적인 소재의 희랍풍의 미술(Gracco-Buddist Art)을 통칭 간다라 미술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간다라 미술 가운데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이 바로 불상의 발생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논의가 분분하고 강력한 반대의 의견도 있어서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 없지만 아직까지 많은 학자들이 이 설에 동조하고 있어서 유력한 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불상의 성립에 대하여서는 몇 종류의 유품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로 화페에 그려진 불상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쿠샨조의 제3대 카니스카왕이 만든 화폐에 붇다라는 기록과 함께 서있는부처의 상(佛立像)을 새긴 동화(銅貨) 등이다. 이 외에 왕의 상인지 불상인지 분명하지 않은 그런 상이 새겨진 동화(銅貨)들이 있는데 마우에스동화(Maues銅貨)와 가다페스동화(Kadaphes銅貨)이다. 둘째로 사리용기(舍利容器)에 새겨진 불상이다. 이것은 카니스카 대탑(大塔)으로 알려진 폐탑(癈塔)에서 1905년에 발굴된 그릇 뚜껑에 부착된 삼존상이다. 좀 소박한 듯하면서도 꽤 정제(整齊)된 수법을 보여주는 이 상은 년대가 비교적 확실한 불상이어서 불상 기원문제에 중대한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또한 비마란(Bimaran) 출토의 사리 용기의 그릇 주위에 압출(押出)된 조각으로 불상과 네 사람의 예배자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원 전 1세기 중엽 경에 인도 서북 지방을 지배하던 아제스(Azes)1세의 동화(銅貨) 4매와 함께 발굴되어 한때 불상의 기원이 기원전 1세기 중엽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까지 말했지만 그 후 이 용기는 2세기말경 탑 재건 때 넣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어서 꼭히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초기 불상으로 귀중한 자료임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세째로 연대가 새겨진 불상이다. 318년명(318年銘) 로리얀탕가이 출토 선부처상(佛立像), 384년 하스트나가르(Hashtnagar)의 선상(詞梨母立像), 마메네-데리(Mamane-Dheri) 출토의 제석굴설법도(帝釋屈說法圖)가 있다. 이 연대있는 불상들은 제작 시기가 다소 늦은 간다라 후기 양식으로 보고 있지만, 자료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여튼 연대가 확실한 불상을 기준으로 초기 불상을 살펴보면 대개 불전도(佛傳圖)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기원보시도(祇園布施圖; 페샤와르 博物館藏, 기원 후 1세기 말기)인데, 여기에는 오른쪽에 제자를 거느린 부처님이 왼쪽의 보시를 바치는 경건한 재속신자(在俗信者)들을 상대로 서서 보시를 받고 있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불전도에 비로소 부처님상이 출현한 것으로 불 형상의 표현이 이제 확실히 인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계기로 [불탄7보행(佛誕7步行)] [출가전야(出家前夜)] 같은 불전도, 또는 [초전법륜도(初傳法輪圖)] [초예인(草刈人)의 보시도(布施圖)] [바라문선자방문(婆羅門仙者訪問)] [사천왕봉발(四天王奉鉢)(라호르박물관)] 등 2세기 초기의 불전도들이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한결같이 불상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사천왕봉발같은 조각에는 불상이 전 구도에서 단연 압도적으로 크로즈-업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단독 불상의 출현과 함께 밀접히 관련되고 있는 것같다.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라호르 박물관의 부처 선상(佛立像)들, 페샤와르 박물관의 부처 선상들, 칼캇타 박물관의 부처 선상들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들의 출현은 바로 불형상(佛形像)이 이제 완전히 예배상으로 확립되어 전 불교도의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을 뜻한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상으로서의 위엄과 박력을 갖춘 명작들을 내게 되므로써 자연히 불교미술의 융성을 극하게 하였� 것이다.

 이들 간다라불상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불상을 만든 재료가 점판암 계통이라는 점이다. 이 돌을 조각한 후 반질반질 윤이 나게 연마한 것이 특징인데 쑥색 계통도 있지만 대개 검은 색 돌이어서 검게 윤기나는 불상을 보면 흑요석같은 보석을 연상하게한다. 말하자면 고상하고 고귀한 부처님의 품격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단독 예배상을 제외하면 부처님의 일생을 새긴 이른바 [불전부조(佛傳浮彫)]가 간다라 불상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중인도 불상 조각이 부처님의 전생설화를 위주로 부조 작품을 조성한 것과는 무척 다른 점이다. 간다라 미술은 바로 초월적인 불(佛)의 세계를 상징하려 한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고뇌하고 깨닫고 제도하려고 무한히 애쓰다가 돌아가신 부처님과 그 제자, 그리고 그 후의 승단의 변천을 표현하는 데 더한층 매력을 느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현실 감각에 바탕을 둔 미술을 만들어 내었다는 말이다.

 이런 특징있는 불전부조는 간다라에서 열광적으로 애용되었는데 대승불교의 흥기와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 종교적인 관점에서도 흥미거리지만 결국 이 점이 불상을 창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겠다.

 세째, 단독 불상이나 부조 불상조각의 외형에 나타난 특징을 들어야 하겠다.

 눈은 깊게 새기고, 코는 날카롭게도 길게 만들었으며, 입술은 얇고 얼굴은 타원형인데 이러한 얼굴은 아리안인의 서구적인 용모를 그대로 나타내주는 것이다.

 여기에 파상연모(波狀軟毛)라는 구불구불한 부드러운 머라칼을 상투로 묶어 올린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보여준다. 또한 불의(佛衣)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의 두터운 옷인데 깊이 파인 사실적인 옷주름이 표현되었고, 목깃이 턱 밑에서 한번 뒤집어 목을 두른 까운식의 독특한 모양이며, 부처님의 격을 나타내주는 후광(後光)은 둥근 원판 광배로서, 이들 모든 특징은 그리이스 또는 로마식이라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승의(僧衣)를 두르고, 귓볼을 길게 내리고, 중간에 머리칼을 한 번 묶어 육계(肉髻)를 만들었으며, 체관한듯한 정신적인 얼굴 등은 기본적으로 인도식이어서 인도와 그리이스식이 혼합된 것이다.

 또한 초기 간다라 불상은 토카를 둘렀던 초기 로마 황제와 비슷한 점이 있고, 불전부조의 구체적인 힘을 찬미하는 점이나 포도 당초문의 여러 무늬 등은 로마식이다. 그리고 정면성이 강하고 정신성이 명확하게 보이고, 체구가 위엄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선조적(線彫的)이고 분명한 표현 등은 그레코-이란(페르시아)식이어서 그리이스와 인도식의 혼합에 로마.이란의 미술 양식이 복합적으로 융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간다라 불상은 이처럼 복합적인 양상을 띄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이므로 그 설이 분분하고 애매모호하며 불분명한 점 투성이라 하겠다.



 2) 마튜라 지방의 불상 발생


 마튜라(Mathura)는 델리의 동남쪽 약 140Km 떨어진 현 우타루, 프라테시주에 있는 옛도시인데, 중인도로서는 가장 서북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도 중부와 서북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여서- 상업도시로서 크게 흥성하였으며, 이와 아올러 문화와 예술, 그리고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마튜라는 쿠샨조 시대에 들어서면서 종교 미술이 크게 융성하였으며, 중인도 지방에서는 가장 일찌기 불상을 만들어 불상 기원지로 저명하다.

 마튜라가 불상의 발상지라는 것을 최초로 정한 학자는 코루뷰와 쿠드링톤이었다. 이들에 이어 쿠마라스와미(Coomarawamy)가 이 설을 강력히 지지하고 나섰다. 그는 [불상은 1세기 중엽 경 간다라와 아울러 마튜라에도 동시에 양 지역 모두 불교의 내적 발전으로 나타난 필요에 따라 지방적 전통으로 제작에 종사하는 지방 공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간다라와 마튜라에 동시적으로 불상이 발생했다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주장이며, 또한 종래의 외국 영향설에 강력히 반대한 인도 자체의 내적 발전에 의하여 발생되었다는 주장인 셈이다. 즉 인도 재래의 토속신, 가령 약사(Yaksa)신이나 나가(Naga)신에 대한 신앙과 상(像) 숭배전통이 불교에 받아들여져 불상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들 마튜라 불상은 몇 개의 타입으로 발전되었는데 옷의 착의법(着衣法)과 자세에 따라 분류해 두는 것이 통례이다.

 첫째로 편단우견입상(偏袒右肩立像)이다. 카니시카 3년 명(銘)이 있는 사르나트(Samath) 출토의 보살 입상이 대표적인 예인데 당당한 거상으로 박진감이 넘치고 있으며, 이와 비슷한 사르나트 출토의 목이 없는 거상이 있다. 또한 35년 명이 있는 목없는 부처 선상이나 산치 출토 22년 명이 있는 상, 마호리 출토 거상(마튜라박물관) 등이 있는데 앞의 상들 보다 세장하고 박진감이 덜한 상들 이다.

 둘째로 편단우견좌상(偏袒右肩坐像)들이다. 칼캇타박물관의 39년 명(銘)이 있는 보살좌상(2세기 전기), 마튜라 박물관의 29년 명 보살좌상 및 17년 명 보살좌상들이 쿠샨조에 만들어진 비교적 이른 상들이다.

 또한 마튜라 박물관의 카토라 출토 보살좌상은 흔히 마투라불의 대표적인 상으로 손꼽고 있는데 이와 유사한 것으로 뮌헨 박물관의 불좌상(佛坐像)과 아비챠트라 출토의 두 개의 불좌상(칼캇타 박물관) 등은 특히 중요한 상들이라 하겠다.

 세째로 통견입상(通肩立像)들이다. 이들 타잎의 대표적인 예는 마투라 박물관의 불입상(2세기 후기)이 있으며, 이 외에도 산치 박물관의 머리 없는 불입상 등이 유명하다.

 네째로 통견좌상(通肩坐像)들이다. 마튜라 박믈관의 51년 명이 있는 보살좌상(2세기 말기)은 앞의 통견입상과 매우 비슷한 양식의 불상인데, 칼캇타 박물관에도 이와 유사한 머리 없는 불좌상이 있다. 이들 상과 약간 다른 상들이 있는데 마튜라 박물관의 불좌상(3세기 전기), 22년 명이 있는  마튜라 박물관 불좌상 등이 있다.

 이들 마튜라 불상의 특징은 초기에는 인도의 풍토성이 물씬 풍기는 강인한 얼굴, 소발(素髮)의 머리, 얇고 투명한 옷과 주름, 경강(勁强)하고 양감이 풍부한 사실적 신체 등 간다라불과는 판이한 모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마튜라 불상도 2세기말경부터는 간다라불의 영향을 받아 우렁 상투 머리칼인 나발(螺髮)로 변하고, 편단우견의 옷이 통견으로 되었으며, 간다라식 평행의습(平行衣褶)에 마튜라식의 투명한 옷을 걸치는 등 새로운 마튜라불 양식이 대두되었는데, 이러한 양식은 굽타(Gupta)기에 들어와서는 완전히 신마튜라.굽타양식을 확립하여 이후 인도의 정형양식(定型樣式)이 되었던 것이다.


 3) 굽타 시대의 불상


 앞에서 말했다시피 간다라와 마튜라 불상들은 쿠샨왕조 후기부터 서서히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양식으로 변모되다가 굽타왕조시대가 되면서 하나의 새로운 양식을 완성한다. 이것은 마튜라양식이 주류를 이루면서 간다라 양식이 가미된 것이기 때문에 흔히 신마튜라양식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굽타 시대에 완성된 양식이기에 굽타양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칙이다.

 굽타완조는 마우리왕조 시대에 벵갈(Bengal) 일대에서 작은 왕국이 아니면 봉건 영주로 군림한 지방 왕국이 4세기 중엽, 정확히 말해서 320년(또는 318년)에 시조(始祖) 챤두라굽타(Candra-gupta; 320-345) 1세 대왕에 의하여 대왕국으로 발전한 나라이다. 그 다음 대왕인 사무다라굽타시대(345-380)에 대정복국가를 완성한 후 챤드라굽타2세(380-414), 쿠마라굽타(414-455),스칸디굽타(455-467)를 지나면서 강성을 극하다가 6세기 중엽 경 급격히 쇠퇴한 나라인데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여 수많은 불교미술, 특히 걸작의 최상급 불상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굽타미술 양식은 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는데 650년 경까지도 굽타시대로 인정한다. 이 시대는 오랜 외래적인 영향이 사라진 후 인도의 문화적 민족주의가 난숙하게 꽃피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대 미술은 전형적인 인도식으로 변한다. 더구나 석조 조각이 굽타의 중부와 남부 지방에서 많이 만들어지고 테라코타 조각도 흔히 조성되었는가 하면 거대한 조각이 크게 유행되었고, 수많은 불.보살들과 신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의 도상적 특징이 완성된 것이다.

 이 굽타 양식은 첫째, 세속적인 활력과 정신적인 고상함이 잘 조화되었고, 둘째 활기차고 우아한 형태미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세째 그로테스크한 특징과 장엄한 위용이 결합되어 특이한 양식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던 활력이 넘치는 육감적 사실주의와 여기에 우아한 아름다움까지도 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이 바로 굽타의 불상 조각이라 하겠다.

 그런데 후기 굽타양식으로 넘어가면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신체가 점차 세장(細長)해지면서 섬약해지고, 신체의 굴곡이 과감하게 묘사되며, 활력있는 형태가 형식화되고 장대하지만 세련미는 줄어지는 경향을 띄게 된 것이다.

 이처럼 다소의 변화는 있지만 고차원의 정신적인 내면성은 세계에서가장 잘 표현되었고, 우아하고 생기차며 멋들어진 조각이라는 점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양식이 더 발전하면 육감성이 너무 노출되고, 방종한 기교성이 과도하게 표현되어 세련된 고전성이 사라지고 만다.

 어쨋던 굽타 시대의 불상은 이상적인 인체의 미를 불상 조각에 멋들어지게 잘 나타내어 세계에서 가장 고상하고 우아하며 시실적인 양식을 창조해낸 위대한 조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불상 조각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당나라와 신라에 전해지면서 한층 난숙하게 발전하여 우리의 조각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승화시켰고 그리하여 석굴암 불상같은 세계적인 걸작을 창조해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첨부이미지간다라불상

 

k-37.jpg마투라불상

 

 굽타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