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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의성

빙계계곡

노촌魯村 2008. 5. 5. 18:45

 빙계계곡

 빙계계곡

마을 건너편에 수십 미터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그 아래 맑은 시냇물 가운데 우뚝 솟은 크고 작은 무수한 바위는 1933년 10월 4일 경북도내 경북팔승의 하나로 뽑혔으며, 계곡 가운데 돋보이는 높이 10m, 둘레가 20m 정도의 유난히도 큰 바위에 빙계동(氷溪洞)이란 커다란 글씨가 새겨진 건 임진란 때 여기 들른 명장 이여송(李如松)의 필적이란 얘기도 있다. 그 옆에 단 하나의 큰 바위 위에는 경북 팔승지일 이라고 새긴 아담한 돌비(石碑)가 자리잡고있다. 경북 8승의 하나로 얼음구멍과 바람구멍이 있어 빙산이라 하며, 그 산을 감돌아 흐르는 내를 빙계라 하고, 동네를 빙계리라 부른다.(의성군청)

 

 

 의성빙산사지오층석탑 (義城氷山寺址五層石塔 보물 327호)

단층인 기단부(基壇部)에서 지대석은 16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기단의 가운뎃돌은 안기둥인 탱주(撐柱)와 귀기둥인 우주(隅柱), 그리고 면석 모두를 각각 낱개의 돌로 구성하였다. 기단의 맨 윗돌인 갑석은 8개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로 탑신을 받치기 위해 굄돌을 높게 배치하였다. 탑신부(塔身部)에서 초층 옥신석에는 탱주(撐柱)나 우주(隅柱)를 배치하지 않았으며, 정면에 감실(龕室)을 설치하였다. 2층 이상부터 옥신석은 그 높이가 1층에 비해 반 이상 줄었으며, 5개의 옥개석은 그 형태가 벽돌로 쌓아올린 전탑(塼塔)처럼 낙수면과 받침에 층단을 나타내었는데, 낙수면의 층단은 모두 5단이며, 층급받침은 4단이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의성탑리오층석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나, 규모가 좀 더 작고 간략하게 제작되었다.참고 : 경상북도 문화재대관 (의성군청)

 

 빙산사지 오층석탑의 감실

 빙산사지 오층석탑의 옥개석

 빙산사지오층석탑의 감실 불좌대

 

빙혈

마을 뒷산 산기슭의 바위 아래 너덧 명이 들어 설수 있는 방 한칸 만한 넓이의 공간이다. 여기선 입춘(入春)이 되면 찬 기운이 나고 한여름엔 얼음이 얼어 있다. 입추(入秋)가 지나면 차차 녹아 동지(冬至)에는 볼 수 없고 훈훈한 바람이 나온다.

 빙혈 내부

  빙혈 내부

  빙혈 내부의 바위(바위 틈에서 찬 바람이 나옴)

 풍혈(찬 바람이 나오는 구멍)

동구 도로 변 바위와 바위 사이에 뚫린 좁고 깊은 곳으로 여름엔 찬바람이 나오고, 겨울철은 훈훈한 더운 바람이 일고 있다. 그 근방 크고 작은 바위 사이엔 거의 같은 현상이 일어 나는 편이다.

 

 빙계서원

이 서원은 조선 명종(明宗) 11년(1566)에 회당(悔堂) 신원록(申元祿)이 창건하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봉향하였다. 창건시에는 의성읍 장천(현 남대천 상류)에 위치하여 선조 9년(1576) 장천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선조 33년(1600)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이 춘산면 빙계리로 이건 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합향하여 빙계서원으로 개칭하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추향하여 오다가 대원군의 전국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2002년도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착공한 복원공사가 2006.5월 완공됨에 따라 지역유림의 뜻모아 이건의 공적을 기려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을 추향함으로서 6현을 봉향하고 있다. (의성군청)

김안국 :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아버지는 참봉 연(連)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이다.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웠으며, 조광조·기준(奇遵) 등과 사귀었다.  예조 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박학하고 문장에 능한 성리학자로서 저서에 《모재집》·《모재가훈》, 편서에 《이륜행실록(二倫行實錄)》·《동몽선습》 따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