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주산성(主山城)
경북 서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고령읍에 주산성(主山城)터가 있다. 고령읍은 옛 대가야(大伽倻)의 도읍지이다. 고령읍내 향교 자리에 ‘고대(高臺)’ 혹은 ‘대거대’로 불리는 왕성(王城)터가 있다. 여기가 대가야를 세운 이진아시왕으로부터 16대 도설지왕에 이르기까지 520년간 내려온 대가야의의 도읍이었다. 이 왕성을 보호하듯 고령읍의 중심부까지 밀치고 들어서 있는 해발 311m의 주산(主山)에는 사적 제61호인 주산성(主山城)이 있다. 지금은 허물져서 겨우 흔적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 산성은 대가야의 왕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동시에 신라 화랑 사다함의 눈부신 활약을 보인 곳으로 추정된다.
화랑 사다함은 진흥왕때의 화랑이었다. 그는 풍모가 깨끗하고 준수하며, 지기(志氣)가 방정하였다. 화랑이 된 후 1천여명의 낭도들이 다투어 그의 환심을 얻으려 했다고 한다. 진흥왕 23년(562)에 왕은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낙동강 유역의 잔존세력인 대가야를 평정하게 하였다. 이 때 사다함은 15,6세의 어린 나이로서 귀당비장(貴幢裨將)이 되어 종군하였다. 그는 5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진격하여 성문으로 들어가서 백기를 세워 놓았다. 성중의 가야군사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신라의 대군이 뒤따라 들어오니 모두 항복하였다. 이로서 낙동강 일대가 모두 신라의 영역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군사들이 개선하자 진흥왕은 사다함의 공로를 책정하여 가야인 300명을 주었는데 그는 이를 받아서 모두 놓아주어 양민을 만들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다시 전지(田地)를 하사하니 그는 알천(閼川)의 불모지를 청할 따름이었다. 사다함은 친구인 무관랑과 죽여도 변하지 않을 벗으로 사귈 것을 약속하였는데 무관랑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그는 몹시 슬피 통곡을 하다가 결국 7일만에 죽었다. 그 때의 나이가 17세였다고 한다. 화랑 사다함은 나라를 위한 전쟁에서는 용맹함과 명예와 재산에 대해서는 초연한 자세를 보여 주었으며, 벗에 대한 신의와 준수한 용모 등 여러 면에서 진흥왕대의 전형적인 화랑상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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