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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매소성(買소城)

노촌魯村 2009. 2. 12. 23:08

3) 매소성(買소城)

매소성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고구려 매성현(買城縣) 즉 지금의 경기도 양주로 비정하는 것이 통설이나 이 성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매소성에서 문무왕 15년(675)에 신라군이 당군을 크게 무찔러 나당전쟁에서 당나라에 결정적 타격을 주고 마침내 삼국통일을 자주적으로 성취하는데 기여하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평정된 후 당나라는 이 양국을 차지하여 직접 지배하려 했고, 신라의 자주권마저 빼앗으려 했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의 평양 이남의 땅을 주기로 한 약속을 위배하여 신라를 배신하였다. 이에 신라는 670년에서 676년에 이르기까지 대당항쟁을 감행하였다. 삼국통일을 성취하고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싸음이었다.

675년 당나라의 이근행이 20만 명의 군사를 지휘하면서 남하하였다. 한편 설인귀가 서해로 침입하였다. 신라 장군 문훈(文訓) 등이 천성(泉城)에서 설인귀의 수군을 격파하여 1,400여 명의 머리를 베고, 병선 40척을 빼앗고, 전마 1천 필을 얻는 대승리를 하였다. 이러한 전황 속에 그 해 9월 29일 이근행의 20만 대군이 매소성에 내려와 주둔하였다. 신라군은 이를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전마 30,380필을 얻고 많은 수의 무기를 빼앗았으며 당나라 군사들을 베었다. 이 매소성 싸움이야말로 통일전쟁 최대의 대회전으로 신라군이 대승함으로서 삼국통일을 성공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이루었다. 이 싸움을 필두로 이 해에 신라군은 또 다른 여러 성에서 18회나 당군을 쳐서 승리하고 6,047명의 목을 베고 전마 200필을 얻었다.

한편 이 매소성은 원술랑의 한탄스런 일화를 전해 주는 곳이기도 하다. 원술랑은 매소성 싸움이 있기 3년 전 비장(裨將)이 되어 당군과 싸웠으나 화랑답게 싸워 죽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부친인 김유신장군 앞에 나설 수 없어 숨어 살았다. 다음 해 김유신장군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는 어머니 지소부인을 만나보려 청하였으나 그 어머니도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는 탄식하며 세상을 등지고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 숨어살았던 것이다.

그 후 매소성에서 당군과 혈전이 벌어졌다. 원술랑은 이 소식을 듣고 이 싸움에서 죽음으로서 앞서의 치욕을 씻고자 했다. 그는 신라군의 선두에서 서서 적진에 돌입하여 분투하였다. 화랑으로서 명예를 되찾을 수 있다면 죽음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적군은 원술 앞에 기세가 꺾이어 쓰러지고 물러났다. 매소성 싸움에서 신라군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원술과 같은 화랑들의 신라군을 이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술은 이 싸움에서 큰 공을 쎄우고 높은 상을 받았다. 이제는 전날의 치욕을 씻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는 어머니 지소부인을 뵈고자 갔다. 그러나 지소부인은 뼈를 깎듯 괴로웠지만 원술을 자식으로 맞아주지 않았다. 한번 범한 치욕은 끝내 용서받지를 못했던 것이다. 원술은 너무나 원통하고 한탄스러웠다. 그는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한평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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