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화랑유적지

황산벌(黃山伐)

노촌魯村 2009. 2. 13. 20:22

3) 황산벌(黃山伐)

황산벌(黃山伐)은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 일대의 넓은 평야지대이다. 연산면 관동리와 표정리 사이에 북산성 또는 황산성으로 부르는 성터가 있는데, 이 산성은 백제 수도 사비성의 중요한 방어선이고 요총지였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면 연산면 일대와 황산벌이 한 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 논산 방면으로 넓은 평야가 이어지고 있다.

이 황산벌은 통일을 향하여 진군하는 신라군과 국가의 존망을 눈앞에 둔 백제군과의 필연적이고 처절한 일대격전이 있었던 곳이다. 태종무열왕 7년(660) 7월 9일에 김유신장군, 김흠춘, 김품일 등이 거느린 5만의 군사는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 이르렀다. 백제 진영에서는 계백이 이끄는 5천여 명의 결사대가 비장한 각오로 대치하였다. 신라군은 수적으로 절대우위에 있었으나 완강하게 저항하는 백제군 앞에 쉽사리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오히려 사기가 위축되고 있었다. 연합군인 당의 군대와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서 합세하기로 약조가 돤 날짜는 7월 10일이었다. 신라군의 진영에서는 초조감만 더해갈 뿐 별다른 묘책이 없는 상태였다. 이 때 김유신장군의 아우 김흠춘장군은 아들 반굴(盤屈)을 불렀다.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을 다하여야 하고, 남의 아들이 되어서는 효도를 다하여야 한다. 위급한 일을 보고 목숨을 내놓는 것은 충성과 효도를 다하는 일이다.”

흠춘은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아들을 사지(死地)로 내몰아 괴로웠지만 반굴은 오히려 당당하였다. 반굴은 말에 올라 단신으로 백제진영 깊숙이 달려들어가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양 진영은 다시 잠잠해지고 신라군은 여전히 저하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굴의 값진 희생으로 신라군의 사기가 진작되리라 기대했으나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러갔다. 신라진영에서는 어떤 값비싼 희생을 치르더라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계기를 만들어야 했다. 이 때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官昌)을 불렀다. 화랑 관창은 이 때 15세의 소년이었다.

“너는 비록 나이는 어리나 의지와 기개가 있으므로 오늘이야말로 네가 나설 때이다.”

관창은 부친의 말씀을 듣고 곧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백제진영으로 달려나갔다. 삼국사기는 관창이 의표가 단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창은 질풍처럼 달려들어 창을 휘드르며 백제군을 몇 명 죽였다. 그러나 겹겹이 에워싼 백제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백제군사들은 관창을 원수 계백(元帥階伯) 앞으로 끌고 갔다. 계백은 관창의 투구를 벗겨보고 신라의 용장(勇將)이 어린 소년임을 보고 놀랐다. 이미 처자의 목숨을 스스로 끓고 생사를 초탈한 계백이었다. 계백은 의연하게 부하에게 명하여, 관창을 묶어 말잔등에 실어 신라 진영으로 되돌려 보내게 했다. 이 광경을 보는 신라진영 군사들의 사기는 여전히 위축된 상태였다. 관창은 화랑으로서 싸움에 나가서 적에게 사로잡히고, 또 살아 돌아온 것이 부끄러웠다.

“내 적진 속으로 뛰어 들어갔으나 적장을 죽이고 깃발을 빼았아 오지 못한 것이 한이다.”

관창은 두 손으로 샘물을 움켜 마시고 다시 말에 올랐다. 투구를 고쳐매고 백제진영을 향하여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갔다. 한참 후, 관창의 말이 되돌아 왔는데 말안장에 관창의 목이 매달려 있었다. 품일장군은 그 아들 관창의 머리를 들고 소매로 피를 씻으면서 절규하였다.

“관창아, 네 얼굴 모습은 산 것과 같구나. 네가 나라를 위하여 할 일을 했구나!”

신라군사들은 묵묵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그들의 가슴속마다 용솟음치는 불길을 느낄 수 있었다.

“나가자! 관창과 반굴의 뒤를 따르자!”

드디어 신라진영에서 진군의 북소리가 울렸다. 신라군사들은 파죽지세로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였다. 용감하게 항전하던 백제의 결사대는 중과부적으로 모두 옥쇄하였다. 참으로 처절한 전투였고, 통일을 향한 값비싼 대가를 치루었던 것이다.

화랑의 임전무퇴 정신은 화랑 뿐 아니라 낭도나 일반 병졸에 이르기까지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아까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화랑도가 집단수련을 통하여 강한 결집력과 일체감을 가질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일본의 무사도를 자랑해 마지않는 일본의 역사가들도 흠춘과 품일이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하여 자신의 귀중한 아들들을 전사하게 한 사실에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카마쿠라(鎌創)막부 초기의 이름난 무장이었던 구마가이(熊谷直實)가 전쟁터에서 끓임 없이 자기 아들을 비호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화랑유적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성산성(石城山城)  (0) 2009.02.13
가림성(加林城)  (0) 2009.02.13
내사지성(內斯只城)  (0) 2009.02.13
삼년산성(三年山城)  (0) 2009.02.13
관산성(管山城)  (0) 2009.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