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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금란(金蘭 : 지금의 통천)

노촌魯村 2009. 2. 13. 20:31

2) 금란(金蘭 : 지금의 통천)

 

금란굴 

삼국유사 백률사조에는 효소왕 2년(693) 국선(國仙) 부례랑(夫禮郞)이 안상(安常) 등 그의 무리 일천여명과 더불어 금란을 순례한 기사가 있다. 삼국유사 경문왕조에는 국선 요원랑(邀元郞), 예흔랑(譽昕郞), 계원(桂元), 숙종랑(叔宗郞) 등이 금란을 유람했다고 한다. 부례랑과 안상의 우정, 요원랑 예흔랑 등 네 화랑의 나라를 지킨다는 굳은 결의 등을 엿볼 수 있는 기사이다. 금란 지방은 동국(東國) 제1의 선경(仙境)으로 알려져 왔다. 총석정, 금란산, 금란굴이 있는 해안지대로서 지금은 통천군이나 신라시대에는 금양군이었고 별호로 금란이라 했다. 사선(四仙)의 행적을 따라 기행한 이곡은 동유기에서 금란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통주는 옛날의 금란현(金蘭縣)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성 북쪽면에 있는 석굴을 금란굴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금란굴은 관음보살이 살던 곳이라 한다. 이튿날에 배를 타고서 바위 기슭을 끼고 가서 들여다 본 즉 석굴 가운데 희미하게 보살 형상이 서 있는 것이 보이었다. 그러나 굴속이 깊고 좁아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금란은 지금의 통천 지방 즉 금강산 일대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통천 지방에 금란산, 금란굴, 금란산성의 지명이 보인다. 이 금란 지방은 화랑들이 동해안 순례를 할 때 주된 목표지였다. 화랑들은 수백 혹은 수천여명이 무리를 지어 금성을 떠나 명주(강릉), 양양, 고성을 거쳐 통천의 금란 지방에 이르렀던 것이다. 금란이란 역경계사(易經繫辭)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끓으며, 마음을 같이 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는 말에서 따 온 지명이다. 신의와 우정 즉 교우이신(交友以信)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수련을 하던 산이나 굴 혹은 영마루 등을 금란(金蘭)이라 했고 그러한 장소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을 금란현이라 했을 것이다. 이곡이 통천을 금란현이라 한 것은 이에 연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문선이나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고려시대에도 수많은 문인들이 줄을 이어 화랑의 유적지인 금란을 돌아보고 남긴 기행문과 시가 있다. 사선(四仙)을 비롯한 화랑에 대한 추앙은 고려 후반기에 유행한 도가적 신선사상(神仙思想)에 기인했을 것이다. 풍류도는 도가적 요소가 없지 않겠지만 이 땅의 아름다운 산천을 찾아 무리를 지어 강한 일체감으로 수련하는 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풍류적 정신의 발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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