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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보덕성(報德城)

노촌魯村 2009. 2. 13. 20:29

2) 보덕성(報德城)

 

 

보덕성은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 서고도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석축산성이다. 사적 제92호이며 성의 둘레는 약 690m이다. 현재는 문지(門址)와 저장시설 등이 남아 있다. 익산토성이라고도 칭하지만 1980년의 발굴조사 결과 네모반듯한 석재를 사용한 성벽이 발견되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취도(驟徒)와 그의 형 부과(夫果), 막내인 핍실(逼實) 등 3형제의 생사를 초월한 충성담이 전해지고 있다. 취도는 조천성(助川城)싸움에서 부과는 웅진성 남쪽에서 각각 전사하였다. 막내인 핍실은 이 보덕성에서 값진 죽음을 택하였다.

고구려가 평정된 후 문무왕은 고구려의 유민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봉하였다. 보덕국은 이 성을 중심으로 670년에서 684년에 이르기까지 14년 간 존속하였다. 안승의 친족인 대문(大文)이 모반을 기도하다가 처형되었다. 이를 계기로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들이 실복(悉伏)을 우두머리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왕 4년(684)에 왕은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여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귀당제감(貴幢弟監)이었던 핍실은 싸움터에 나서면서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나의 두 형님이 이미 나라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썩지않는 이름을 남겨 놓았으니, 내 비록 불초하나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고 구차히 살려고 하겠는가? 오늘 그대와 헤어지는데 이것이 아주 영원한 이별이 되는 것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고 잘 살아 주기를 바라오!”하고 떠났다. 핍실은 적과 대진하게 되자 홀로 적진에 뛰어 들어가서 힘써 싸워 수십 명을 격살하고 전사하였다. 신문왕은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취도는 죽을 곳을 알아 형제들의 마음을 격동시켰고, 부과와 핍실은 또한 의(義)에 용감하여 그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참으로 장하다.”

한편 이 싸움에서 김영윤(金令胤)도 화랑정신을 발휘하였다. 그는 황산벌에서 전사한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또 그의 조부인 각간 흠춘(角干欽春)은 진평왕 때의 화랑이었다. 김영윤은 이러한 명문세가에서 자라나서 명예와 절개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황금서당보기감(黃衿誓幢步騎監)으로 보덕성 토벌에 참가하였다. 그는 “싸움에 임하여 오로지 진격만이 있고 퇴각이 없는 것은 사졸(士卒)의 당연한 도리이다.”하며 적진으로 뛰어들어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신문왕은 이 말을 듣고 “그런 아버지가 없고는 이런 아들이 없을 것이니 그 의열(義烈)이야말로 가상한 일이다.”하였다.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13,00920000,35&queryText=(`보덕성`)<in>(z_title,z_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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