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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삼일포(三日浦)

노촌魯村 2009. 2. 13. 20:32

3) 삼일포(三日浦)

 

 

동해안의 휴전선 최북단 통일전망대에서 철책을 넘어 고요하고 황량한 모래사장을 지나 멀리 바라보면은 맑은 날에는 해금강(海金剛)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온다. 꿈에 그리던 금강산의 일부이다. 옛 중국사람들도 고려에 다시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 일러 왔다. 주봉인 비로봉이 1638m이며 크고작은 봉우리만 해도 영랑, 일출, 월출, 채선, 집선, 오봉, 세지들이 있다. 영랑봉이 화랑 영랑의 이름에서 연유함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이 절경의 금강산은 화랑들에게 다시없는 수련지였다.

사선(四仙)의 순유(巡遊)는 총석정의 사선봉, 금란굴을 거쳐 삼일포에 이른다. 이곳의 경지에 취해 사선이 3일 동안 머물렀다고 해서 삼일포라 한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동해안의 모래는 눈같이 희고 사람이 밝으면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가 쟁쟁하여 마치 쇳소리와 같다.’라고 했다. 동해안에서도 간성, 고성 지방에서 휴전선 너머 통천에 이르는 해안은 모래와 고요하고 푸른 바다, 흰 파도가 어우러져서 절묘한 경관을 이룬다. 이곳의 모래는 우는 모래라는 뜻으로 명사(鳴沙)로 불려 왔다.

이곡의 동유기에 의하면 삼일포의 서남쪽 작은 섬에 석감이 있고, 그 동북쪽 벼랑의 바위 벽에 ‘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의 6자가 새겨져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안축(安軸 : 고려 충숙왕 때의 학자)의 삼일포기문(三日浦記文)에는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으로 판독하고 있다. 현재는 글자가 모두 마멸되어 알아 볼 수 없지만, 사선이 이곳을 순례한 흔적임은 확실한 것이다. 삼일포에는 안상정(安祥汀)이라는 곳도 있어, 사선 중에 한 사람인 안상이 즐겨 머물었던 곳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홍귀달(洪貴達 : 조선 연산군 때의 문장가)의 싯귀에 “바람은 영랑호에 높고 달은 안상정에 떠 오르네(風高永郞湖 月上安祥汀)”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동유기에는 또 사선의 기념비가 이 삼일포와 총석정, 한송정에 있었는데, 호종단(胡宗旦)이란 자가 삼일포와 한송정의 사선비를 고의로 깨뜨려 버렸다고 한다. 호종단은 원래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벼슬을 했던 자인데. 비석의 파괴가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선을 비롯한 옛 화랑들은 대자연의 정기속에서 자연과 일체가 되어 훌륭한 품성을 도야해갔다. 무리가 어울려 순유하며 풍류를 즐기고 도의를 연마함으로서 강한 동질감으로 뭉칠 수 있었다. 그들의 우정과 신의는 다투어 대의(大義)를 위하여 앞장서는 시대정신을 형성시켰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던져 강렬한 삶을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화랑정신이 있었기에 삼국통일이 신라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