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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팔공산

동화사 비로암

노촌魯村 2009. 6. 24. 07:17

 

 동화사 비로암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높이 3.71m로 규모는 작으나 각 부분의 비례가 신라 석탑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보주만이 남아 있다.  탑신부의 옥개석과 옥신석은 각각의 돌로 만들었고 옥개석 받침은 각층 모두 4단이다. 기단은 2중 기단인데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중대석을 같은 돌로 만들었다. 이 탑에서 특이한 점은 기단 갑석의 윗면에 굴곡이 있는 삽입식 받침을 사용한 것인데, 통일신라 말기에 사용되던 형식이다.  신라 민애왕이 왕위 다툼 과정에서 사망하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촌간인 심지대사가 경문왕 3년(863) 조성한 것으로 '민애대왕석탑' 이라고 부른다. 도굴로 인해 상층기단 일부 탑신부에 이상이 있어 1967년 해체·복원되었는데, 1층의 몸돌의 사리공에서 금동그릇 밑부분과 금박을 입힌 작은 목탑이 발견되었다 

        

 

호분이 입혀져 있을 때의 동화사 비로암의 비로자나불

불상 높이 1.29m, 광배 높이 1.97m, 대좌 높이 89㎝이다.  이 불상처럼 두 손을 가슴 앞에서 위아래로 포개어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수인인 지권인(智拳印)을 결한 부처를 비로자나불이라 한다. 비로자나(Vairocana)는 본래 '광명을 두루 비친다'는 뜻으로 지혜와 광명을 어디에나 두루 비친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비로자불은 부처님의 가장 궁극적인 모습인 진신(眞身)이요, 법신(法身)인 것이다.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비로자나불상은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하얀 호분이 입혀져 있어 원래의 표정과 섬세한 조각 상태를 살필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좌대와 광배까지 모두 갖춘 불상으로 눈·코·입이 모두 작고 어깨도 좁다.
광배는 매우 화려하며 화불이 모두 아홉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 역시 화려하며 손모습은 지권인을 하고 있다.  상대석은 겹으로 새긴 연꽃이 위로 솟아있는 앙련의 꽃잎속에 낱낱이 꽃무늬를 넣었고, 중대석에는 구름사이에 사자를 조각하였다. 하대석은 간단하게 여덟 장의 연꽃이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는 복련을 돌렸다

 

 

 

 

 

문화재청 자료 사진           

 

민애대왕석탑사리호(敏哀大王石塔舍利壺보물  제741호 서울 중구  필동3가 26 동국대학교도서관)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 내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사리 항아리이다. 사리를 탑에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이 항아리는 높이 8.3㎝, 아가리 지름 8.0㎝, 밑지름 8.5㎝이다. 현재는 크고 작은 4개의 조각으로 깨졌고, 뚜껑도 없어졌으며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같은 손상은 도굴 당시에 입은 피해로 보인다. 아가리가 넓고 어깨가 부풀어 있으며, 아랫부분이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 작고 아담하다. 이러한 형식은 법광사 삼층석탑,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어깨부분에는 꽃 구름무늬와 촘촘한 빗금 꽃무늬를 두 칸에 나누어 새겨 둘렀다. 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 38행의 글자를 음각하였다. 글 중에는 이 항아리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을 위하여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민애왕의 행적들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또한 탑을 만든 시기가 경문왕 3년(863)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있다(문화재청 자료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12,07410000,11&queryText=(`동화사%20비로암`)<in>(z_title,z_content) )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사리구(대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