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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만인의총(萬人義塚.사적 제272호)

노촌魯村 2010. 3. 21. 19:04

忘戰必危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

 

 

 

 

만인의총(萬人義塚.사적  제272호.전북 남원시  향교동 628 )

조선(朝鮮)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 남원성(南原城)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倭賊)과 항전하다 전사한 군·관·민(軍·官·民)을 합장한 묘이다. 왜군은 임진란(壬辰亂) 때의 패배(敗北)가 전라도(全羅道) 지방(地方)을 점령하지 못한데 있다고 보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선조 30년(1597) 7월말 이 계획에 따라 왜군 11만명이 좌우군(左右軍)으로 나뉘어 우군은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좌군은 남원을 공격하였다. 남원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키는 중요한 전략상의 요충지(要衝地)로 나라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이곳에는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과 광양현감(光陽縣監) 이춘원(李春元),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의 군사와 명(明)의 부총병(副總兵) 양위옌(楊元)의 3천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8월 7일 왜군의 선봉대(先鋒隊)가 남원 지역에 모습을 나타냈고 13일에는 왜군의 주력군이 남원성 아래 집결하여 남원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동문에는 양위옌, 남문에는 일군(日軍)의 천총(千摠) 지앙삐야오(蔣表), 서문에는 마오(毛) 청시엔(承先), 북문에는 이복남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14, 15일 이틀동안 혈전이 전개되었다. 쳐들어오는 왜군과 맞서 침식도 잊은 채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다음날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양위옌은 포위망을 뚫고 서문을 통해 달아났다. 이 싸움에서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 방어사(防禦使) 오응정(吳應井),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별장(別將) 신호(申灝), 부사(府使) 임현(任鉉), 통판(通判) 이덕회(李德恢), 구례현감(求禮縣監) 이춘원(李春元) 등이 전사하였다. 이밖에 남문을 통해 성안에 침입한 왜군에 의해 학살된 군관민의 수는 거의 만여명에 달하였다. 난후 순절(殉節)한 시신을 한 곳에 합장(合葬)하는 한편 광해군(光海君) 4년(1612) 충렬사(忠烈祠)를 건립하여 접반사 정기원 등 8충신을 받들었다. 처음 이 묘는 남원역(南原驛) 부근에 있었으나 1964년 현재위치로 이전되었다. (문화재청 자료) 

 순의탑

 

  만인의총정화기념비

박정희 대통령 글씨

 

 

 

 

 

 

 

 

 팔충신 사적비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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