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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당대(唐代) 명품전(경주박물관 특별전)

노촌魯村 2012. 4. 18. 07:10

중국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당대唐代 명품전

주周, 진秦, 한漢, 당唐 등 13왕조의 수도였던 서안시에 자리하고 있는 섬서역사박물관은 매우 수준 높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중국의 대표적 박물관입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섬서역사박물관의 소장품 가운데 당(618~907)의 수도였던 국제도시 장안長安과 장안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명품들이 선보입니다. 이 전시품들은 모두 국내에서 처음 전시되는 것들로서, 동시기 신라 문화와의 비교 감상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총 80건 159점의 전시품 가운데 우리나라의 보물에 해당되는 1급 문물도 10건 16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금동제 용, 원앙무늬 금잔, 팔각 금잔  등이 1급 문물들로서 수준 높은 당 문화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당대(唐代)품전(국립경주박물관) 바로가기 :

 http://gyeongju.museum.go.kr/html/kr/exhibitions/exhibitions_020201.html?idx=130&mod=view&GotoPage=1

 

아래 모든 그림 설명문 국립경주박물관 자료 입니다.

 

 

 

 

 

 

 문고리(서안시 대명궁 출토.당 618 - 907) 

 자물쇠와 열쇠(당 618 - 907) 

 마차 장식(서안시 호가묘 출토. 당 618 - 907)

용머리 모양으로 입에 구슬을 문 채 눈을 부릅뜨고 있다. 마차의 장식품으로 추측된다. 

 소가 끄는 수레(당 7 - 8세기)

전체적으로 녹유를 발랐다. 차체는 아치형으로 덮개가 있고 앞뒤로 차양이 튀어나와 있으며, 앞은 격자 형태로 투각하였고 뒤쪽에 문이 있다. 소는 목에 끌채를 매고 있는데, 위로 솟은 뿔과 발달된 가슴, 굵은 다리로 서 있는 힘찬 느낌을 준다.  

 연꽃무늬 주춧돌(서안시 단백양묘 출토 당 618 - 907)

가운데 윗부분에 구멍이 뚫려있고, 그 주위로 8개의 두툼한 연꽃잎이 둘려져 있다.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주춧돌의 일종으로 추정된다. 

 좌 . 연꽃무늬 수막새(서안시 대명궁 출토 당 618 - 907) 우 . 용얼굴무늬 수막새(섬서성 유림 출토 당 618 - 907) 

연꽃무늬 전塼(서안시 대명궁 출토  당 618 - 907) 

천팔현무대내(天八玄武大內) 명銘 벽돌(서안시 대명궁 출토 당 749년) 

짐승모양 백옥진(중국 1급 문물 당 618 - 907) 

손잡이 부분은 바닥에 웅크린 자세에 사나운 두 눈을 하고 있는 짐승을  형상화하였다. 사냥한 동물을 양발로 누른 채 입으로 물고 있는데 마치 물어뜯는 듯한 모습이 생생하다. 한나라 때부터 수당대까지 미술품에 보이는 이러한 종류의 동물 모습은 사자와 비슷하면서도 머리에 뿔이 달린 이수異獸의 형상이다.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효과를 기대하였다, 

 

 

좌 : 백자병白瓷甁 (서안시 한삼채韓森寨 출토 당 618 - 907)

원래 북방 유목민족이 물을 담을 때 사용하는 가죽으로 만들던 주머니를 독창성을 발휘하여 흙으로 굽는 방식으로 단순화하였다. 당나라 때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요금(遼金)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다. 

우 : 마카라무늬 은잔(출토 미상 당 618 - 907)

길고 구불구불하게 곡曲이 있는 형태는 페르시아식 은그릇을 모방한 것이다. 고대 인도의 전통적인 물고기 무늬인 마카라무늬를 망치로 두드려 양쪽에 새겨 넣었으며, 주변에 구슬무늬로 장식했다. 그릇 안쪽 면에는 꽃무늬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능화菱畵 모양 돌소반(서안시 한삼채 출토 당 618 - 907)

한백옥漢白玉으로 만들었으며, 입은 여석 번 구부러진 능화 모양이다. 두리에 바닥은 평평하며 세 개의 발足은 6각 기둥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의 그릇은 금은기에서 자주 보이지만, 금은기의 발은 대개 발굽이나 구부러진 모양으로 각기둥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재질이 돌이라서 가공이 불편한 탓에 발을 각기둥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삼채병三彩甁(서안시 장락파長樂坡출토 당 7세기)

목이 짧고 배부분이 불록하며 구부러진 모야의 손잡이가 달려있다. 서아시아 주전자의 특징과 중국의 전통적인 조형이 잘 결합된 것으로 당나라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각국간 활발한 문화교류의 결과임을 짐작하게 한다. 

 

 팔각금잔(중국 1급 문물. 서안시 하가촌何家村 출토 당 8세기)

옆부분이 여덟 개의 면으로 되어 있고 그 중 한 면에는 구슬무늬로 이어진 둥근 손잡이가 달려 있다. 손잡이 위쪽에는 호인胡人 얼굴을 덧붙였다. 각 면은 손에 악기를 든 악사로 장식하고 경계부분은 구슬무늬로 장식하였다. 소그드 지역에서 유행한 은잔과 모양이 같아 소그드 장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금동제용金銅製龍(중국 1급 문물. 서안시 초장파草場坡 출토 당 8세기)

몸통을 힘있는 앞발로 굳건하게 지탱하여 균형을 이루면서 생동감과 위력이 넘친다. 전체적으로 유려한 S자형의 모습인 이 용은 철심에 동을 입혀 주조한 후, 도금하였다.  

 

 

 

 꽃과 새무늬 은쟁반(서안시 한삼채漢森寨 출토 당 618 - 907)

출토 당시 절반만 남아 있었다. 판 안쪽에 봉황 장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꼬리와 발만 보인다. 봉환의 발과 다리에 잔털과 깃털이 조각되어 있는 등 매우 세밀하게 만들어졌다. 남아 있는 부분만 보아도 본래 정교하고 화려했을 걱으로 추정된다. 

 채색여인상(중국 1급 문물. 서안시 왕가분王家墳 출토. 당 8세기)

초당初唐 시기 부녀자의 복식은 수나라 때 유행하던 날씬한 모습을 유지했으나, 성덩盛唐 시대부터는 넓고 긴 치마와 화려한 회장, 풍만한 체형이 새롭게 유행하였다. 당나라 고분 벽화에서도 이 상과 비슷한 우이하고 세련된 당시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남장한 채색 여인상(서안시 고루촌高樓村 출토. 당 8세기)

머리는 양쪽으로 갈라 묶었다. 둥근 깃에 긴 옷을 입고 배 아래쪽으로 허리띠를 찼다. 유연한 자세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여자 도용이 남자의 차림새를 모방한 것은 당대에 유행한 남장 여인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국화무늬 은제꽂이(출토지 미상. 당 618 - 907)

나비 날개 형태에 꽃무늬가 투각된 은제 머리꽂이이다. 꽃무늬는 활짝 핀 다섯 송이의 국화가 가지넝쿨과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다. 같은 모양으로 두 개를 만들었고, 좌우대칭으로 머리 양쪽에 사용하였다. 

우 위 : 납제석함(서안시 출토 당 818 - 907)

여성의 화장품을 담았던 통이다. 몸체와 뚜껑은 음각한 돗자리무늬를 몸체 양쪽에는 구름무늬를 새겼다.

우 아래 : 옥제빗(서안시 출토. 당 618 - 907)

한쪽 면은 장수의 의미를 담은 나뭇가지를 입에 문 거북 한 쌍을, 다른 한 면은 나뭇가지와 꽃이 장식되어 있다. 당나라 부녀자들은 머리에 빗을 꽂아 치장하는 것을 즐겼다. 머리빗 재질은 용도에 따라 다르며 그 중 장식용은 금.은.옥.상아 등 귀한 재료로 더욱 공들여 만들었다.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는 도용(중국 1급 문물. 섬서성 정인태묘鄭仁泰墓 출토 당 664년경)

소규모의 궁정악무단을 묘사한 것이다. 전통적인 한족의 악무이지만 악기로 볼 때 서북지방 소수민족 음악의 특색도 눈에 띤다. 7명 가운데 6명은 머리를 양쪽으로 묶어 올렸고 나머지 1명은 하나로 틀어 올렸다. 얼굴에는 지분脂粉을 발랐으며 표정은 온화하고 부드럽다. 2명은 춤을 추는 사람이고 5명은 악사인데 손에 서로 다른 악기를 들고 반주하고 있다.  

 비파를 연주하는 채색 여인상(서안시 한삼채漢森寨 출토. 당 8세기)

머리를 높게 올려 묶고 둥근 깃에 넓은 소매의 옷을 입었으며 품에 비파를 안고 있다. 당대의 악무활동은 이미 각계각층에 퍼져 있었다. 군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기념일이나 주연이 있을 때 악무공연이 빠지지 않았다. 

소를 부는 기마 인물상(섬서성 소릉昭陵 출토. 당 639년 경) 

당 태종의 능인 소릉에서 나온 이 상은 머리에 풍모風帽를 쓰고 소매가 넓은 붉은색  옷을 입고 말을 타고 있다. 두 손으로 팬플룻과 비슷한 악기인 배소排蕭를 쥐고 부는 자세이다. 배소는 중국 고대의 관악기로 주나라 때 이미 모습을 갖추었고 한대漢代에 유행하였으며 당나라 궁중 아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채색 무관용(출토지 미상. 당 8세기)

머리에 관을 쓰고 소매통이 넓은 붉은 색 상의에 양당을 입었다. 양손을 가슴 앞에 모은 모습이 위엄있어 보인다. '구당서' '여복지與服志'에 복식의 색애 대해 '삼품 이상은 자색, 사품은 짙은 붉은 색, 오품은 옅은 붉은 색, 육품은 짙은 녹색, 칠품은 옅은 녹색, 팔품은 짙은 청색, 구품은 옅은 청색을 입고 평민은 황색을 입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붉은 색을 띠는 도용의 복식으로 볼 때 품계가 높은 관리를 나타낸 것으로 추정된다. 

 채색 무사상(섬서성 장무현長武縣 출토. 당 8세기)

머리에 투그를 쓰고 명관개明光鎧 갑옷을 입었다. 양쪽 어깨에는 피박被縛을 걸쳤으며 앞쪽 옷자락이 신발 부분까지 늘여져 있다. 전형적인 당나라 무사의 복장이다. 중국 고대의 군복 스타일은 진한秦漢 시기에 이미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룬 상태였고, 남북조시기에 장기간의 전쟁을 거친 후 당대에 들어서  더욱 발전하였다. 당나라 때 갑옷은 종류와 재료도 다양했으며 명관개는 특히 보호 효과가 좋아 많이 사용되었다. 

명광개(明光鎧) : 갑옷의 한 가지, 황칠을 하여 그 광채가 상대방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고 한다.

 남장한 채색 여인상(서안시 한삼채 출토. 당 8세기)

당나라 때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를 배경으로 여성들도 복식의 아름다움을 대담하게 표현하였다. 또한 '남녀의 복식에 차이를 둔다'는 전통적인 예법을 깨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남자의 복식을 착용했다. '구당서 여복지'에 당시 여자들이 남자의 복식을 착용한 상황에 대해 '천보天寶 연간(742 - 756)에 사루士流의 처가 남편의 옷을 입고 가죽신. 적삼. 모자를 착용했는데 내외일관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객사도(모사본. 당 706년 신룡2년. 섬서성 건현乾縣 장회태자묘章懷太子墓 묘도墓道 동벽東壁)

 

 삼채 여인상(서안시 출토. 당 8세기)

가늘고 여린 하체에 비해 상체와 머리가 발달하였다. 채색은 양 어깨와 소매 등 주로 상체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얼굴과 작은 이목구비, 미소 띤 표정은 당대 여인용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피리 부는 기마 인물상(섬서성 의덕태자묘懿德太子墓 출토. 당 706년 경)

머리에 풍모를 쓰고 진지한 모습으로 피리를 불고 있다. 의덕태자 이중윤李重潤은 당 중종의 장자로 중종과 위황후 사이에서 출생한 유일한 아들이었다. 고종 대 황태손으로 책봉된 후 701년(대족大足 원년) 19세 나이에 측천무후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705년 히현李顯이 새로 황위에 오른 후 이중윤을 의덕태자로 추증하고 묘를 능으로 격상시켜 예우하였다. 의덕태자묘에서 천 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이 유물은 말을 타고 악기를 연주하는 여러 도용 가운데 한 점으로 의덕태자가 의장을 갖추고 출행할 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삼채 천왕상(서안시 출토. 당 8세기) 

체격이 크고 위풍당당하다. 머리에는 짐승모양의 관을 썻으며 갑옷을 입고 있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고 고힘 치듯 벌린 입 사이로 치아가 보인다. 오른손은  허리에 두고 왼손은 주먹을 쥐고 있으며 발로 악귀를 밟고 있다. 천왕상은 당나리 때 새로 나타난 부장용 도용인데, 일반적으로 무덤의 문 안쪽에 벽사를 기원하며 물리치는 용도로 쓰였다. 

 

 

 

 

 기러기무늬 물그릇(중국 1급 문물. 서안시 하가촌何家寸 출토. 당 8세기) 

 옆면을 한 쌍의 원앙과 기러기무늬로 장식하였고 그 사이에 식물무늬를 배차하였다. 원래는 큰 기러기를 홍鴻, 작은 기러기를 안雁이라 했다. 기러기는 높이 날아 멀리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커다란 뜻과 진취적인 기상을 지닌 군자를 비유하는데 쓰였다. 

 

 

 

 꽃무늬 은그릇(출토지 미상. 당 8세기)

아가리는 밖으로 벌어져 있고 배 부분이 부풀어 있으며 얕은 굽이 달려있다. 구연과 굽 부분을 기하학적인 무늬로 장식하였고 그릇 표면에는 절지화折枝花무늬를 새겼다.

 

 해당화모양 접시(서안시 출토. 당 9세기)

4곡曲의 해당화 모양이다. 정면 아래에 날개를 펴서 날아오르려는 원앙 한 마리가 새겨져 있고 주위에는 권초券草무늬, 연꽃무늬, 구슬무늬가 새겨져 있다. 가장자레에 꽃잎이 6갈래인 작은 꽃을 장식했는데, 배치가 가지런하며 정교하다. 만당晩唐시기(836 - 907)의 작품이다.  

 

 은그릇 뚜껑(섬서성 유림배음촌柳林背陰村 출토. 당 8세기) 

 은제단지(서안시 하가촌何家村 출토. 당 8세기)

 손잡이와 뚜껑이 있고 바탕은 민무늬이다. 뚜껑 안쪽에 '구량九兩'이라는 글자가 있다. 양쪽 어깨에 고리를 달아 손잡이와 연결했다. 한 쪽 연결 부분에 19마디로 된 쇠사슬 고리가 있다. 

 

 

 

 원앙무늬 잔(중국 1급 문물. 서안시 하가촌 출토. 당 8세기)

네모난 형태의 귀가 한 쌍 달려 있다. 잔 전체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릇 바닥은 여러 겹의 꽃무늬로 되어 있다. 안쪽의 절지화무늬는 꽃과 잎이 무성하다. 바깥 면에는 넝쿨무늬와 기러기, 원앙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모양의 잔은 중국 고대에 술을 담았던 것으로 전국시대에 나타나 한나라 때 널리 쓰였다. 당나라 때 만들여진 잔은 한나라의 칠기를 주로 모방하였고 당 이후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금은평탈경金銀平脫鏡(출토지 미상. 당 8세기)

거울 뒷면에 넝쿨무늬로 바닥을 덮고 난새鸞鳥 두 마리와 천마天馬가 하늘을 날고 있다. 그 사이에는 날짐승 네 마리가 날고 있다. 풀잎의 가운데 부분을 금점金點으로 장식했다. 금은평탈경은 당나라 때 새로이 나타난 거울인데, 세공이 정밀하고 재료와 공을 많이 들어서 주로 황족과 고관이 사용했던 공예품이다. 선물용으로도 쓰였다. 

 은접시(서안시 하가촌 출토. 당 7 - 8세기)

망치로 두드려 형태를 만들고 몸체는 도금하였다. 옆면이 둥글게 처리되었고 깊이는 얕다. 바닥 윗면에 구름 사이를 나는 까치 세 마리가 새겨져 있다.  

 꽃잎모양 은접시(섬서성 유림배음촌柳林背陰村 출토. 당 618 - 907)

다섯 갈래의 꽃잎이 펼쳐진 모양으로 무늬가 없으며 바닥이 약간 솟아 있다. 망치로 두드려서 형태를 만들었다. 

 

 은젓가락(서안시 왕가분王家墳 출토. 당 618 - 907)

길다란 젓가락으로 민무늬이다. 은으로 만든 젓가락은 음식의 독을 검사하는데 썼으며 당대 귀족들의 호화스러운 생활방식을 보여준다.

 

은그릇(서안시 하가촌 출토. 당 7 - 8세기)

입이 벌어져 있고 높이가 낮으며 바닥은 편평라다. 두드려서 만들었고, 표면은 아무런 장식을 넣지 않은 채 광택 처리하였다. 용도는 세면도구이다. 

 용무늬 마구장식(섬서성 출토. 당 618 - 907)

윗부분이 둥근 판에 S자형의 곡선을 그리며 하늘을 나는 용 두 마리를 좌우대칭으로 장식하였다. 용의 주변에는 물고기알무늬를 채워 넣었다. 또 다른 금도판에 표현된 용 두 마리는 앞발을 머리 위로 치켜 든 역동적인 자세를 하고 있다. 용의 주변에는 상서로은 구름무늬가 가득하다.  

 말재갈(출토지 미상. 당 618 - 907)

금도금된 S자 모양의 말재갈이다. 말재갈 중에서도 좌우의 봉상捧狀 재갈ㅓㅁ추개부분에해당된다. 재갈쇠나 고삐이음쇠와 연결되는 고리부분이 마련되어 있다,  

 

 금동장식(섬서성 영태공주묘永泰公主墓 출토. 당 706년 이전)

가죽이나 비단으로 된 허리띠에 끼워 사용했던 것이다. 장신구를 보면 허리띠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으며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둑알(서안시 출토. 당 618 - 907년)

바둑은 혁 이라고도 한다. 당대 바둑판은 17줄에 바둑알 289개로 현재와 거의 차이가 없다. 바둑알은 주로 옥으로 만들었으며 검은색과 흰색 두 가지였다. 바둑을 두는 방법도 오늘날과 비슷하다. 당나라 때 이미 피일후皮日休의 '원혁原弈'  바둑의 기원과 전략에 대해 기술한 서현徐鉉의 '위기의례圍棋儀例' 등과 같은 바둑 전문서적도 있었다. 당시 바둑은 황제부터 문인. 선비. 촌부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청동관음보살입상(섬서성 보계시寶鷄市 출토. 당 8세기 후반)

보관의 정면에 새겨진 화불좌상, 오른손에 쥔 버드나무 가지, 왼손에 정병으로 보아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상체에는 드리개가 달린 목걸이와 함께 조백條帛을 비스듬하게 착용하였다. 살이 오른 얼굴과 살이 찐 신체 표현, 전체적으로 과장되면서도 경직된 조형성으로 보아 제작 시기는 성당시기 이후로 추전된다.

금동관음보살입상(중국 1급 문물. 출토지 미상. 당 7세기)

광배와 대좌를 따로 만들어 상과 결합하였다. 비교적 단순한 형식의 대좌와 광배, 2단으로 걸친 천의 형식과 긴 영락장식, 수대隨代 보살상을 연상시키는 얼굴 표정, 비교적 큰 손과 발의 크기, 과장되 않는 삼굴三屈자세 등으로 보아 초당시기인 7세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보인다.

금동불좌상(섬서성 폐품장廢品場 발견. 당 8세기)

옆면에 안상이 뚫린 8각의 높은 받침대와 산중하 3단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의 연화대좌 위에 앉아있는 불상이다. 왼손을 무릎 위에 대고 오른팔을 올린 이와 같은 수인은 당대 아미타불좌상에서 자주 보인다. 명상적인 얼굴표정을 비롯하여 대좌형시과 전체적인 조형성 등, 성당시기인 8세기 조각양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금동관음보살입상(서안시 길상촌吉祥村 출토. 당 8세기 전반)

옆면에 큼직하게 안상이 뚫린 6곡曲 능형菱形의 받침대 중앙에서 연꽃이 피어나고 그 위에 보살상이 서 있는 모습이다. 목과 허리와 무릎을 살짝 굽힌 자연스러은 삼굴자세, 적절한 신체 비례, 이상화된 얼굴표정은 성당시기에 제작된 보살상의 특징이다.

흙으로 찍어 만든 불상((서안시 소토문촌小土門村 출토. 당 7세기)

모양을 새긴 틀에 진흙을 눌러 찍어 그늘에서 말린 후 낮은 온도에서 구워 만들었다. 당대에 유행했던 이와 유사한 부조상의 뒷면에는 선업니善業泥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들을 흔히 선업니불상이라 부른다. 현장玄裝을 비롯한 구법승들이 인도에서 새롭게 가져온 이국적인 불상을 모본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조삼존불(서안시 서시유적西市遺蹟 출토. 당 8세기 후반)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 위에 본존불아 앉아있고, 그 양옆으로 보살이 협시한 당대의 전형적인 삼존불상이다. 특히 왼손을 무릎 위에 대고 오른손을 올린 본존불의 수인과 좌협시보살의 보관ㅇ레 새겨진 화불로 보아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삼존불임을 알 수 있다. 살 찐 얼굴 모습과 경직된 표정, 빈약한 하체의 표현, 음각선 위주의 옷주름 처리 등으로 보아 제작시기는 성당시기 이후로 추정된다.

손잡이 달린 향로(서안시 출토. 당 7세기)

승려들이나 신도들이 불교의식에서 공양할 때 사용하던 청동향로이다. 몸체와 손잠이의 연결부분은 둥글고 볼록한 여의두如意頭와 비슷하게 처리되었고, 손잡이 끝 부분은 아래로 접혀있다. 손잡이가 달린 향로 중에서도 장식이 적은,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것이다.

춘추인물고사무늬 단지(중국 1급 문물. 섬서성 유림배음촌柳林背陰村 출토. 당 9세기)

항아리 표면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여러 인물이 함께 모여 있는 옛 이야기를 표현하였다. 옆에 적힌 글씨로 보아 춘추시대 학자인 자로子路를 비롯하여, 영공문정靈公問政, 소정묘少正卯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당나라 말기에는 유가儒家와 관련된 소재의 문양이 금은그릇에 응용되었다.

은제단지(서안시 하가촌何家村 출토. 당 8세기)

은으로 만든 작은 단지 4점이 도교의 연단鉛丹에 사용되는 광물들과 함께 하가촌 창고 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단지의 입구는 작은 구멍으로 되어 있었다. 연꽃무늬 받침에 0.5cm 정도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은제 용기들은 모두 연단에 사용되엇던 것으로 추전된다.

뚜껑달린 동제병(서안시 출토. 당 618 - 907)

벌어진 아가리에 얇고 긴 목, 둥근 어깨, 볼록한 배 부분, 나팔모양의 낮은 굽이 특징이다. 뚜껑 안쪽 면에 은으로 된 막대가 병 내부에 삽입된다. 이러한 형태의 은병은 매우 드문데, 술을 담는 용기였던 것으로 추전된다. 은으로 된 막대은 남은 술의 분량을 재는데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은제 역사상(출토지 미상. 당 7세기)

무기를 든 채 역동적인 자세로 위협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역사상이다. 네 구 모두 콧수염이 달린 험상궂은 얼굴의 이른바 서역인 무사의 용모를 특징으로 한다. 머리에는 명관개明光鎧를 착용하였다. 머리 뒤로는 이중의 화염광배를 둘렸고, 발 아래에는 대좌가 있다. 이 역사상들은 본래 어딘가에 부착하여 장식했던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 통일신라 감은사지 석탑 출토 사리함의 사천왕상과 비슷하여 흥미롭다.

 

 

 

   

           

 십이지상(서안시 출토. 당 8세기 후반)

얼굴은 12간지 동물을 형상화했다. 몸은 사람 모양으로 목이 길고 옷깃과 소매가 널찍하다. 옷은 발 아래까지 늘어져 있고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으고 있다. 12간지 동물 도용을 부장하는 풍습은 북위北魏 때 처음 나타났으며, 수나라 때부터 8세기 중반인 당 현종 천보 연간까지 사실적으로 묘사된 도용이 유행했다. 이 십이지상은 8세기 중반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십이지상(서안시 출토. 당 8세기 후반)

얼굴은 12간지 동물을 형상화했다. 몸은 사람 모양으로 목이 길고 옷깃과 소매가 널찍하다. 옷은 발 아래까지 늘어져 있고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으고 있다. 12간지 동물 도용을 부장하는 풍습은 북위北魏 때 처음 나타났으며, 수나라 때부터 8세기 중반인 당 현종 천보 연간까지 사실적으로 묘사된 도용이 유행했다. 이 십이지상은 8세기 중반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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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yeongju.museum.go.kr/html/kr/exhibitions/exhibitions_020201.html?idx=130&mod=view&GotoPage=1

 

위의 모든 그림 설명문 국립경주박물관 자료 입니다.  

경주박물관

            

대길상천녀주 경쾌판

동영상 출처

음성 大吉祥天女(演唱版)

출처: http://buddha.goodweb.cn/music/musictxt7/yydc.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