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주/경주인근자료

경주 서악동 귀부 (慶州 西岳洞 龜趺).김인문묘 (金仁問墓).김양묘 (金陽墓)

노촌魯村 2012. 5. 22. 21:59

 

 

 

경주 서악동 귀부 (慶州 西岳洞 龜趺.보물 제70호.경북 경주시 서악동 1006-1) 

 서악리 태종무열왕릉의 남쪽 길 건너편에 남아있는 것으로,『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서악서원의 영귀루 북쪽 받침에서 찾아낸 비석조각에 새겨진 글로 미루어, 김인문(629∼694)의 공적을 새겨놓았던 비의 받침돌인 것으로 짐작된다. 네 발로 힘있게 디디고 있는 받침돌의 거북은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다.앞뒷발의 발가락이 모두 5개인 것이 다를 뿐 기교면에서 태종무열왕비의 귀부와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목에 새겨진 다섯가닥의 목주름은 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거북의 등에 새긴 큼직한 육각무늬 역시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등 주위에 새긴 구름무늬와 그 바깥쪽에 구슬을 꿰놓은 듯한 무늬를 돌린 것은 독특한 모습이다. 등중앙에는 비를 꽂아 두었던 네모난 홈이 마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거북받침돌의 양식적인 변천을 볼 때, 9세기 부터는 거북의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게 되는데, 서악리 귀부는 거북머리의 원형을 잘 지니고 있어, 한국 석비 받침돌의 최초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삼국통일 후인 7세기 중반으로 추정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김인문묘 (金仁問墓.경상북도 기념물 제32호.경북 경주시 서악동 1006-1)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문무대왕의 친동생 김인문(629∼694)의 묘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많이 읽었고 특히 글씨를 잘써 태종 무열왕의 비문을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하였다. 또한 넓은 식견과 훌륭한 재주와 솜씨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20대에 당나라에 들어가 좌령군위장군이 되었고 신라에 들어와서는 군주가 되어 장산성을 쌓는데 감독을 맡았다. 외교술에 능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당나라에게 신라측 협조사항을 받아내는데 큰 공을 세워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당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가 효소왕 3년(694)에 죽었다. 당 고종은 그의 시신을 호송하여 신라로 보냈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벼슬을 내렸고 서악에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 특별한 시설이 없이 높이 6.5m의 흙으로 높이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문화재청 자료) 

 

 김양묘 (金陽墓.경상북도 기념물 제33호.경북 경주시 서악동 1006-1)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의 왕족 김양(808∼857)의 묘이다. 태종 무열왕의 9대손으로 흥덕왕 3년(828)에 고성 태수가 되었고 무주 도독을 지냈다. 가는 곳마다 많은 공적을 남겨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830년에 장보고와 함께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신무왕)을 왕으로 추대하여 모셨으며 신무왕이 일찍 죽자 뒤를 이은 문성왕을 다시 모셨다. 문성왕 19년(857)에 나이 50세로 죽자 그에게 대각간(大角干)의 벼슬을 내리고 태종 무열왕의 릉(陵) 서열에 따라 그 곳에 같이 모셨다. 특별한 시설 없는 비교적 큰 무덤이며 흙으로 높게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문화재청 자료)

 

 

김인문 묘 옛 사진(일제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