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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麗水 統制李公 水軍大捷碑).여수 타루비(麗水 墮淚碑).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

노촌魯村 2013. 2. 1. 09:55

 

여수 역사를 잘 아는 이들은 진남관과 관련된 고소대를 중요하게 손 꼽는다. 이곳에는 1947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비각 안에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 타루비(墮淚碑), 동령소갈비(東嶺小喝碑)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비각이 세워진 곳이 고소대가 있던 곳으로 남쪽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수군훈련을 독려하고, 임진왜란 발발 후 작전 계획을 세우는 한편 군령을 내린 곳이다. 또한 이곳은 황옥천의 목을 베어 군율을 세운 곳으로도 유명하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타루비는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의 명으로 서울로 운반되었다가 해방 후 해남과 여수 주민들이 서울로 사람을 보내 비석들의 행방을 수소문하여, 경복궁 근경전 앞뜰  땅속에 묻혀 있었던 것을 찾아와 원래의 위치에 옮겨놓았다 한다

 

여수시청에서 오동도 방면으로 가다 보면 여수시 고소동을 지나게 된다. 이곳 고소동의 계산(해발 117m)에 고소대가 있다. 고소대는 성체의 치성 위에 세운 일종의 포루로써 장대로 사용되었으며, 진남관 맞은편 언덕에 위치해있다. 계산(鷄山) 정상에 있어, 돌산대교와 옛 좌수영지로 추정되는 여수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특히 비 개인 뒤 고소대의 당산나무에 걸린 달이 아름다워 ‘고소제월(姑蘇霽月)’이라고 하여, 여수의 8경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고소대에는 이순신 장군의 승첩을 기리기 위해 세운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와 이 비석의 건립 경위를 기록한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 충무공이 전사한 후 부하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세운 ‘타루비(墮淚碑)’가 있다. 비각 중앙의 비석이 좌수영대첩비이고, 오른쪽이 타루비, 왼쪽이 동령소갈비다.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麗水 統制李公 水軍大捷碑.보물 제571호.전남 여수시 고소3길 13 (고소동))  

충무공 이순신의 공훈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대첩비이다. 전라남도 해남의 해남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와 함께 일제의 박해로 1942년 서울로 운반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가, 광복 이후 해남지역 유지들의 수소문으로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 속에서 찾아내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비(碑)는 한 돌로 이루어진 바닥돌 위에 거북받침돌을 두고, 비몸을 세운 후 구름과 용, 연꽃 등이 조각된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의 글은 당시 이름을 날렸던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썼으며, 비몸 윗면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는 비 명칭은 김상용의 글씨이다. 조선 광해군 7년(1615)에 세워졌으며, 비의 왼쪽에는 숙종 24년(1698) 남구만이 지은 비의 건립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에는 이순신의 막료로 활약하였던 수군통제사 유형과 좌수영지역의 유지 및 후손들의 노력으로 건립하게 된 경위를 비롯하여, 이 때 여수 타루비(보물 제1288호)도 대첩비 옆으로 옮겨 세우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였다는 비 건립 전후의 기록이 밝혀져 있다. (문화재청 자료)

 

 

 

 

 여수 타루비(麗水 墮淚碑.보물 제1288호.전남 여수시 고소3길 13 (고소동)

 조선 중기의 명장인 이순신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타루(墮淚)’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중국의 양양 사람들이 양호(羊祜)를 생각하면서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사성어에서 인용하였다. 비의 형태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받침돌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머릿돌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큼직하게 솟아있다. 비문은 ‘타루비’라는 비의 명칭을 앞면에 크게 새기고, 그 아래로 명칭을 붙이게 된 연유와 비를 세운 시기 등을 적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선조 36년(1603)에 이 비를 세워두었다.(문화재청 자료) 

고소대 안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 오른쪽에 있는 타루비는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지 6년후인 1603년, 부하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여 세운 것으로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營下水卒爲統制使 李公舜臣立短碣名曰墮淚 蓋取襄陽人思洋祐而望其碑則淚必墮者也 萬歷三十一年秋立」

(영하수졸위통제사 이공순신입단갈명왈타루 개취양양인사양우이망기비즉루필타자야 만력삼십일년추립. 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를 세우니 이름은 타루이다. 중국의 양양 사람들은 양호를 생각하면서 그 비를 바라다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만력 31년(1603년) 가을에 세우다)
이 비석의 비좌 아래는 땅에 묻혀 알 수 없으나 비좌는 장방향으로 앞과 옆면에 네모꼴 안상을 마련하고 그 안에 풀무늬와 여의주 무늬를 조각하여 장식하였으며 상면은 중판의 연화문을 새겼다. 옥개 부분에도 앞면과 옆면에만 나선형의 구름무늬가 표현되었을 뿐 후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처리되었고 그 위 상부는 반원형의 연봉형 보주가 있다. 비신의 앞면에「타루비(墮淚碑)」란 비명과 하단 좌측에「萬歷三十一年秋立」이란 명문이 있어 선조 36년(1603)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함께 보물 제 571호로 일괄 지정되었던 타루비는 여수 시민들이 유물의 성격이나 건립 연대 등의 차이점을 들어 분리하여 보물로 지정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1998년 11월 27일 보물 제1288호로 지정되었다.(여수시청 자료)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

고소대에서 본 진남관

 

고소대에서 본 돌산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