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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왜성 (順天倭城)

노촌魯村 2015. 2. 7.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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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왜성(順天倭城.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1번지 외 )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낮은 구릉지대에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 만든 성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장 소서행장이 일본군의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하여 쌓은 왜성이다.
순천왜성은 왜교 또는 예교(曳橋)라 하며 일본사람들은 순천성이라 부르고 있고, 1997년 1월 1일 국가 사적 제49호에서 해제되기 전까지는 ‘승주 신성리성’으로 불려왔다.
성벽은 외성 3첩과 내성 3첩으로 쌓았는데 내성만 그 흔적이 분명하고 외성은 분명치 않으며, 성 주위에는 연못을 둘러 판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성은 1598년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군 사이에 최대의 결전이 벌어진 곳이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소서행장을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둔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출처:문화재청)

 

정유재란(1597年) 당시 육전에서 패퇴한 왜군선봉장 宇喜多秀家(우끼다히데이)와 堂高虎(도오다까도라)가 호남을 공략하기위한 전진기지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쌓은 토석성으로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끈 1만 4천여 명의 왜병이 주둔하여 조·명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남해안 26 왜성중 유일하게 한곳만 남아 있다. 

순천왜성은 수륙요충지로서 성곽 규모가 120,595m²(36,480평), 외성 2,502m, 내성 1,342m로 외곽성(토석성)3개, 본성(석성) 3첩, 성문 12개로 축조된 성곽으로 검단산성쪽의 육지부를 파서 바닷물이 차도록 섬처럼 만들고 연결다리가 물에 뜨게 하여 예교, 왜교성이라 하며 일인들은 순천성이라 부르고 있다. 임진란 패인이 전라도의병과 수군의 용전에 있었다고 보고 전라도를 철저히 공략키 위해 풍신수길의 야심에 따라 전라도 각처에 진지를 구축해 공세를 강화하였으나 무술년(1598년) 8월 그가 급사 후 왜성에 주둔해 있던 침략 최정예부대인 소서행장 왜군과 조·명 수륙연합군 사이에 2개월에 걸친 최후·최대의 격전을 펼친 곳이다. 

순천시가지에서 여수 쪽으로 6㎞쯤 가다가 왼쪽으로 6㎞를 가면 200여호가 사는 신성리 마을과 이충무공을 배향한 충무사가 있고 남쪽 200m 지점 광양만에 접한 나지막한 송림에 위치한 왜성은 유정. 권율이 이끄는 육군 3만6천, 진린,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 1만 5천병력이 왜성을 비롯 장도 등을 오가며 왜군을 격멸했고 이충무공이 27일간을 머물면서 전사 하루 전 소서행장을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첩을 거둔 유서 깊은 전적지로서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역사의 산교육장이기도 하다.(출처 : 순천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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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자(垓字)

                  

 

 

 

문지(門址) 1

 

 

 

 

 

문지(門址) 2

 

 

 

 

 

 

 

천수기단(天守基壇)

 

 

 

 

 

천수기단(天守基壇)에서 내려다 본 광경

 

 

조선과 일본이 마지막 전투를 치렀던 바다는 산업단지가 들어설 부지로 매립이 되었다. 배가 드나들었던 곳에는 6차선 넓은 도로가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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