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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경주의 의병 김씨 사부자

노촌魯村 2015. 12. 26. 17:09

임진왜란과 경주의 의병 김씨 사부자


우리 집 보물전 그 두 번째 이야기는 400여 년 전 경주시(慶州市) 양북면(陽北面) 두산리(斗山里)에 살았던 문옹 김석견(汶翁 金石堅 1546~1614) 선생과 그의 세 아들에 대한 것입니다. 문옹 선생은 경주부(慶州府) 남쪽 동정리(東亭里)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에 열심이었으며, 문정(汶亭)을 짓고 많은 선비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였습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선생은 나이 47살에 두 아들(몽수몽남)과 지역의 청장년 백여 명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제사를 받들고 대를 이을 생각으로 둘째 아들(몽양)은 집에 남겨두었으나, 부인 윤씨가 전쟁에 나서도록 했습니다. 내남면 노곡리 곽천전투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 창을 맞고 26(1596, 선조 29)에 전사했습니다.

문옹 선생은 왜란 뒤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임명되었으나, 아들을 잃은 슬픔에 벼슬을 사양했습니다. 그리고 양북면의 두산별장(斗山別莊)에 기거하며 농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다가 69세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사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 벼슬이 내려졌고, 삼부자(몽양 제외)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습니다.

이러한 선생의 충절과 기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1798(정조 22)에 경주의 사림과 후손들이 두산별장 자리에 두산사(斗山祠)를 세우고 선생과 세 아들들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두산사는 후에 두산서당(斗山書堂)이라고 편액되었습니다. 김해 김씨 문옹공파 후손들은 선조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집 옆에 묘우(廟宇)를 짓고 유품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