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충효당(盈德忠孝堂.중요민속문화재 제168호.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6길 48 (인량리))
조선 성종 때에 처음 세운 집으로 이애 선생이 짓고, 이황 선생의 성리학을 계승·발전시킨 이현일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뒷쪽으로 옮긴 것이라고 하며 충효당(사랑채)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건물이다.
안채, 사랑채, 마구간, 사당, 정자 등이 넓은 대지 위에 남향으로 자리를 잡았고, 후원에도 상당히 넓은 대밭이 있는 대규모집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어울려서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의 사랑채가 마주 놓여 있는데 사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앞쪽 들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 왼쪽에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가 있고 안채 뒷쪽에 사당이 있다. 사당은 담장으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높은 기단 위의 충효당은 지금도 후학의 교육장으로 이용되고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이 고루 갖추어 있는 조선시대 양반집으로 처음 지은 것은 조선 초기로 추측되나 이 집은 후대에 옮긴 건물이다. 그러나 안채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시기가 조선 중기로 짐작되는 건물로, 다소 변형된 듯 보이지만 조선 시대 주택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출처:문화재청)
충효당은 지금도 후학의 교육장으로 이용되고있다.
충효당 온돌방 내부
안채외곽
사랑채
안채
사당
정부인 안동장씨(장계향張桂香 1598~1680)와 충효당
정부인 안동장씨(장계향張桂香 1598~1680) : 조선 중기의 문인, 요리 연구가.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요리 방법을 한글로 기록한 《음식디미방》을 남겼다.
1598년 경상도 안동부에서 성리학자 장흥효의 딸로 태어났다. 흔히 정부인 안동장씨로 알려졌는데, 이는 정부인은 그녀의 작위로, 사후 아들 이현일이 정2품에 오르면서 정부인에 추증되었던 것이다. 19세(1616년)에 부친의 제자인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과 혼인해 영해 인량리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이시명의 첫째부인의 1남1녀를 포함해 6남2녀의 자녀를 훌륭하게 길렀다. 시집온 뒤에는 영해 인량리의 충효당에서 당파싸움과 전쟁으로 인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열성을 쏟았으며, 어려운 시간이 계속되자 도토리 열매로 죽을 쑤어 끼니를 떼우게 한 것은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도덕적·사회적 책임의식을 배울 수 있게 하는 한 대목이다.
1631년에는 영양 석보(두들마을, 언덕 위 마을)에 집을 짓고 분가를 했다. 이때 장계향은 남편과 의논을 한 뒤 빈민 구휼을 위한 수단으로 석보의 집 주변 언덕 300여m에다 도토리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시아버지 운악(雲嶽) 이함이 위독하게 되어 다시 영덕의 시댁(충효당)으로 돌아가 시부모를 봉양했다.
이듬해 이함이 별세하고 남편과 함께 3년상을 치른다.장계향은 병자호란(1636년)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기고 은거하려는 남편을 따라 1640년 다시 영양으로 이사 와 살게 된다.
퇴계학통을 계승한 학자 이휘일과, 숙종 때의 남인의 이론가의 한사람인 갈암 이현일(李玄逸)이 그의 아들들이다. 1680년 사망하였으며, 1690년 아들 현일의 영귀로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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