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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국립대구박물관 테마전, ‘삼국시대 기록의 보고, 삼국유사’개최

노촌魯村 2018. 1. 6. 18:10




국립대구박물관 테마전, ‘삼국시대 기록의 보고, 삼국유사’개최


일시 : 2017년 12월 29일(금) - 2018년 2월 25일(일)

장소 : 국립대구박물관 기획전시실


삼국유사 가운데 가장 빠른 초기본, 새로 제작된 삼국유사 목판본, 인각사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화려한 불교 공양구와 도자기 등 삼국유사 관련 자료들 집성

 

국립대구박물관(관장 권상열)은 경상북도·군위군, 연세대학교 박물관, 은해사·인각사와 함께 삼국유사를 주제로 하는삼국시대 기록의 보고, 삼국유사전시를 2017년 12월 29일(금)부터 2018년 2월 25일(일)까지 개최합니다.

승려 일연은 몽골의 영향 하에 있었던 고려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전국을 돌며 역사서, 사찰 사적기, 금석문, 당시 고려인의 증언 등 고대 한반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였습니다. 그리고 군위 인각사에서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삼국유사를 만들었습니다.

전시에서는 삼국유사 초기 판본인 연세대학교 소장 파른본(보물 제1866)을 비롯하여 인각사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공양구, 2017년 완성된 삼국유사 초기 복각본 등이 소개됩니다. 특히 파른본은 왕의 일대기를 담은왕력과 신화와 전설의 이야기로 가득한기이 내용이 결장 없이 완전하다는 점에서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전시 구성은 인각사와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일연의 생애, 삼국유사의 체재, 삼국유사 복각사업, 삼국유사 조선 초기본, 문화콘텐츠의 보고 삼국유사 순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단군신화를 비롯해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락국 등 한반도의 크고 작은 나라들의 이야기가 녹아 있는 책입니다. 또 고대 및 중세 한반도의 살아 숨쉬는 이야기 창고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출처 : 국립대구박물관)
















 

 







 

 

삼국유사 권1~2(三國遺事 卷一~二.보물 제1866호.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신촌동, 연세대학교) 연세대학교박물관)

 연세대 소장 『三國遺事』卷1∼2는 2권 1책만이 남아 있어 자료로서의 한계는 있으나, 壬申本(1512) 이전에 刊行된 공개된 판본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壬申本의 判讀하기 어려운 글자들은 비교할 대상이 없었으나 이 판본으로 인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현전하지 않는 引用文獻의 확인에도 큰 의미가 있다.
따라서 연세대 소장『三國遺事』卷1∼2 는 여러 측면에서 볼 때 國家文化財로 指定하여 硏究하고 保存·管理할 만한 가치가 있다.(출처:문화재청)


공개된 초기 판본인 ‘파른본’은 기증자인 고(故) 파른 손보기 박사의 호를 따 ‘파른본’으로 부르며, 완질본은 아니나 16세기 임신본보다 앞선 판본으로 연세대학교 소장이다.




 












조선 초기 삼국유사 복각 인출본(군위군 제공)













청동뚜껑(靑銅蓋).청동발(靑銅鉢). 인각사(불교중앙박물관. 통일신라 9세기)

청동뚜껑과 청동발은 쇠북 안에서 수습되었다. 뚜껑과 발은 한 세트로 보이며 일부 파손된 부분도 있으나 비교적 보존 산태가 양호하다. 쇠북 안에서 수습된 다른 문화재와 함께 공양구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쇠북(靑銅金鼓). 인각사(불교중앙박물관). 통일신라 9세기

쇠북은 종을 비롯한 사물(법종.법고.목아.운판)과 함께 소리를 내는 법음구이다. 쇠북은 금속으로 만든 북으로 사찰에서 일상적인 알림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인각사 출토 쇠북은 뒷면의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온전한 상태로 출토되었고, 쇠북 안에서는 다른 청동 유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손잡이가 달린 향로(金銅柄香爐).인각사(불교중앙박물관). 통일신라 9세기

긴손잡이가 달린 향로는 승려들이 각종 의식을 행할 때 직접들고 사용하였다. 향을 넣은 부분은 위로 올라가면서 넓게 벌어진 나팔형이며 손잡이 부분에는 연꽃 대좌 위에 별도로 조각한 사자가 놓여 있다. 사자상은 도금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상당히 정교하고 세밀하게 만들어졌다. 인각사 출토 향로는 향함과 마찬가지로 일본 정창원에 흡사한 향로가 전해지고 있다.





손잡이 부분에는 연꽃 대좌 위에 별도로 조각한 사자가 놓여 있다. 사자상은 도금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상당히 정교하고 세밀하게 만들어졌다.



정병(靑銅淨甁).인각사(불교중앙박물관), 통일신라9세기

정병은 원래 인도에서 승려가 지니고 다닌던 물병에서 유래하였다. 이후 부처님 앞에 깨끗한 물을 바치는 공양구로 널리 사용되었다. 뚜껑이 달린 주구부가 몸체에 연결되어 있으며 목 위로 가늘고 긴 주구부가 달려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인각사 출토 정병은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대부분의 정병이 고려시대 이후의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매우 귀중한 자료하고 할 수 있다.


 

탑이 달린 뚜껑을 가진 향합. 인각사(불교중앙박물관). 통일신라 9세기

7층 탑형 뉴鈕가 달린 뚜껑을 갖춘 향합이다. 받침은 상단에서 굽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굽은 높고 편평하다. 몸체는 옆으로 부풀어 오른 반원형이다. 뚜껑 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으나 거의 완전한 상태로 전하고 있다. 향합 내부에는 타고 남은 향의 재가 남아 있어 사리장엄구가 아닌 향합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최고의 보물들이 전해지는 정창원에도 인각사 향합과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는 문화재가 있어 주목된다.

 원통 모양의 이중합. 인각사(불교중앙박물관). 통일신라 9세기

향을 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통형 합이다. 2층으로 된 모체와 뚜껑으로 구성되었다. 몸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가는 선이 음각선으로 둘러져 있다. 원통이중합은 고려시대 금산사 오층석탑. 안성 장명사 탑에서 발견된 합이 있으나 인각사 이중합은 이보다 앞선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되었다.

가릉빈가상. 인각사(불교중앙박물관). 통일신라 9세기

불교에 있어 상상속의 동물로 상반은 사람.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극락정토에 관한 내용이 작힌 '아

미타' 등에 의하면 가릉빈가는 극락정토에 살고 있으며 아름다은 음성으로 부처님의 세계를 꾸미고 있다고 한다. 양 손으로 피리처럼 보이는 악기를 잡고 있다. 하반부와 날개 일부가 결실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해 상세한 표현은 확인도지 않았다



청자그릇(靑磁盌). 인각사(불교중앙박물관). 통일신라 9세기

청자 7점이 포개어진 상태로 수습되었다. 청자의 형태로 볼 때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에서 만든 청자로 추정된다.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제작되어 우리나라로 넘어 왔으며 늦어도 9세기주엽 이전에 다른 문화재들과 함께 묻힌 것으로 생각된다.

인각사 출토품. 경북대학교 박물관. 통일신라 - 조선

인각사에서 진행된 첫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명문기와와 토제품, 도자기 등 다양한 시기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1. 연꽃무늬, 국화무늬, 보상화무늬 수막새

2. 명문기와(정해년 丁亥年 삼월 三月 시주 施主 박천세 朴千世 등 제작일과 시주자 정보 포함)

3. 장고형태 토제품

4. 분청자기 잔.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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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사> 이모저모

 

 

삼국유사 의의 : 《삼국유사 (三國遺事)》는 《삼국사기 (三國史記)》와 함께 현존하는 우리 고대(古代) 사적(史籍)의 쌍벽으로 일컬어져 왔다. 《삼국사기》는 왕명(王命)에 의해 사관(士官)이 저술한 정사(正史)로서, 체재(體裁)가 정연하고 문사(文辭)가 유창하며 화려하다. 이에 비하여 《삼국유사》는 선사(禪師) 한 개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야사(野史)로서, 체재가 짜여지지 못했고 문사(文辭) 또한 박잡(駁雜)하다 하겠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많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이지만, 그 밖에 고조선·기자 및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비롯하여 가락(駕洛) 등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할 수 있고,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드는 배달 민족의 긍지를 갖게 해 주었다. 만약 이 기록이 없었던들 우리는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 역사를 중국의 사료(史料)인 〈삼국지(三國志)〉의 〈동이전(東夷傳)〉에 겨우 의지하는 초라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는 당시의 사서 찬술의 규범에는 벗어나는 체재의 부정연(不整然)과 내용의 탄괴(誕怪)·잡다(雜多)함이 오히려 오늘날 이 책을 더욱 귀한 재보(財寶)로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소이(所以)가 되고 있다.

우선 《삼국유사》에는 단군 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와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실로 《삼국유사》는 우리의 신화와 원형적 옛 전설의 모습을 알게 하는 유일한 책으로 가위 설화 문학(說話文學)의 보고라 할 만하다. 게다가 이 땅 최고의 정형 시가(定型詩歌)인 향가(鄕歌) 14수가 실려 있어 〈균여전(均與傳)〉에 전하는 11수와 함께 주옥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국문학상으로는 사서 이상으로 귀하게 전해지고 있다. 수록한 향가의 수는 비록 많은 것이 되지는 못하지만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알려진 〈삼대목(三代目〉이 전하지 않는 지금, 《삼국유사》의 문학적 가치는 실로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삼국사기》에는 빠져있거나 또는 고의로 빼버린 많은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다. 불교에 관한 풍부한 자료와 신앙·사상·민속·일화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은 모두가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사관이 아닌 승려의 신분으로서 이 같은 책을 저술함에 있어, 더러는 인용서(引用書)와 그 내용이 같지 않은 것도 있고, 잘못 전해져 오는 것을 그대로 수집·수록한 것도 없지 않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 책 자체가 그 서명(書名)이 말하듯이 일사 유문적(逸事遺聞的)인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라 하겠다.(자료출처 : 대한불교 조계종 인각사  홈페이지 (www.ingaksa.org))

 

삼국유사 란 : 삼국유사는 활자본이며,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연대는 미상이나 1281년~ 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慶州府使) 이계복에 의하여 중간(重刊)된 정덕본이 최고본이며, 그 이전에 판각된 듯한 영본(零本)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正使)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整除)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 제재나 문사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즉, 그 중에서도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내세울 수 있게 하고, 단군신화는 단군을 국조로 받드는 근거를 제시하여 주는 기록인 것이다.
그 밖에도 많은 전설 신화가 수록된 설화문학서(說話文學書)라고도 일컬을 만하여, 특히 향찰(鄕札)로 표기된 <혜성가> 등 14수의 신라향가가 실려 있어 <균여전>에 수록된 11수와 함께 현재까지 전하는 향가의 전부를 이고 있어 한국 고대 문학사의 실증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육당(六堂) 최남선은 일찍이 본서를 평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 이라고 까지 하였다.

삼국유사 내용

제 1의「왕력편(王曆篇)」은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赫居世)로부터 후삼국(後三國)의 고려 태조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왕대(王代)와 영표(年表)를 도표식(圖表式)으로 정연하게 보이고 있으며, 그 위쪽과 말미(末尾) 부분에 중국의 역대 왕조와 연호(年號)를 표하여 시대적인 준거가 되게 하고 있다. 왕력(王曆)은 현재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편(篇)으로 처리되어 있지 않지만 이는 부록으로써 단순한 연대표가 아니다. 즉 이에는 각 왕의 대수(代數), 즉위 연대, 존위년수(在位 年數), 릉(陵)의 명칭, 소재(所在), 화장기사(火莽記事), 왕모(王母)에 대한 기록, 왕비(王妃)에 관한 기술, 연호(年號)의 사용, 중국과의 교섭관계, 국호(國號)에 대한 설명, 사찰 건립, 수도(首都)의 옮김, 축성(築城), 제방(堤防), 시장(市場)에 대한 기록, 외침(外侵) 기사 등, 국가적인 중대 사건이 기록되어 있어 단순한 연대 대조표가 아니라 일연의 선대(先代) 역사에 대한 지식과 관점을 알 수 있는 한편의 저술이라 할 것이다.

제 2의「기이편(紀異篇)」은 고조선 이래로 후백제까지 이르는 우리 고대사의 광범위한 영역을 신이(神異)를 바탕으로 하여 1, 2권에 걸쳐 59항목으로 다루고 있다. 권 1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고대사(古代史)로부터 신라의 통일 전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대에 이르기까지의 요사(要史) 및 질문(秩文)을 왕조 중심으로 모은 36항목의 내용이 들어 있다. 권 2는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에서 가락국기(駕洛國記) 등 통일이후 국망(國亡)까지의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백제와 후백제 및 가락 등에 대한 것을 권1의 예에 따라 수록한 23항목이 들어 있다. 특히, 가락국(가야)의 역사는 삼국유사 이외의 다른 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제 3의「흥법편(興法篇)」은 삼국(三國)에서 불교가 공인되기까지의 불교 전래에 대한 기술로, 이에는 사실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도 설화적인 내용이 일부 들어 있지만 대부분 문헌자료에 의거한 것이다.

제 4의「탑상편(塔像篇)」은 불교신앙의 대상인 석탑(石塔), 범종(梵鐘), 불상(佛像), 사찰(寺刹)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불교문화사(佛敎文化史)에 대한 것으로 기왕의 고승전(高僧傳)에 없는 내용이다. 여기에도 설화(說話)로 전하는 영험적인 내용을 일부 전하고 있으나 사지(寺誌), 금석문(金石文) 등을 통하여 비교적 구체성이 있는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제 5의「의해편(義解篇)」은 불교 교리(佛敎 敎理)에 능통한 승려에 대한 전기이다. 그러나 종교적(敎宗的)인 철학에 능통한 자만이 아니라 이미 도에 통하여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한 고승 이야기, 공예(工藝)에 신통한 양지(良志)의 전기, 신이(神異)를 일으킨 고승의 영험 등이 다루어졌다. 고승전에서 자료를 취하면서도 설화를 함께 실었다.

제 6의「신주편(神呪篇)」은 고승들의 신통한 신술력(神術力)에 대한 설화를 모은 것이다. 이는 「기이편(紀異篇)」과 더불어 신이적(神異的)인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다. 하지만 「기이편(紀異篇)」이 왕(王)에 대한 설화가 주(主)라고 한다면 「신주편(神呪篇)」은 승려의 신이(神異)에 대한 설화가 주(主)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 7의「감통편(感通篇)」은 지극한 신심(信心)이 인간적인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설화를 다룬 것이며 이 편(篇)도 신이(神異)로운 내용으로 일관되고 있다.

제 8의「피은편(避隱篇)」은 세속적인 부귀를 탐내지 않고 초연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여기에는 승려에 국한시키지 않고 화랑이나 일반 사람도 주제로 포함되어 있다. 기본사상은 모두 세속사(世俗事)를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불교의 가르침과 일치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의 「효선편(孝善篇)」은 가정의 기본 윤리인 효가 불교에서도 존중되는 덕목이라는 것과 불교적인 선과 연결되는 것이 더욱 값지다는 점을 보여주는 내용이다.(자료출처 : 대한불교 조계종 인각사  홈페이지 (www.ingaksa.org))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襄陽 陳田寺址 三層石塔.국보  제122호. 강원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100-2번지 )

진전사의 옛터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진전사는 8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에 도의국사가 창건한 절이라 전하는데, 터 주변에서 ‘진전(陳田)’이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탑은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 놓은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날아갈 듯한 옷을 입은 천인상(天人像)이 있으며, 위층 기단에는 구름위에 앉아 무기를 들고 있는 웅건한 모습의 8부신중(八部神衆)이 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1층 몸돌에는 각기 다양한 모습의 불상 조각들이 있다.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려져 있어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3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받침돌만 남아있을 뿐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으면서 지붕돌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경쾌한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 가운데 하나이다. 기단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과 1층 몸돌의 세련된 불상 조각은 진전사의 화려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출처 : 문화재청)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軍威 麟角寺 普覺國師塔 및 碑.보물  제428호.경북 군위군 고로면 삼국유사로 250, , 613-1 인각사 (화북리) )

고려 충렬왕 15년(1289)에 입적한 보각국사 일연의 사리탑과 그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탑비이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룬 승려인데, 노년에 인각사에서 늙으신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침에 해가 뜰 때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일연스님 어머니의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탑은 자연석으로 된 바닥돌 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았는데 윗면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가운데받침돌 역시 8각으로, 동물을 조각하였으나 뚜렷하지 않다. 윗받침돌은 8각이지만 원형에 가깝고, 단조롭고 소박한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몸도 8각으로 정면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이란 탑이름이 있고, 뒷면에는 문모양의 조각이 있으며 남은 6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과, 연꽃 위에 서있는 보살상(菩薩像)을 새겼다. 지붕의 두꺼운 추녀 밑은 위로 느리게 들려 있고, 낙수면은 급한 편이며 지붕선 끝부분에 꽃장식이 달려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큼직하게 올려져 있다.
탑비는 국사의 제자인 법진에 의하여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으며, 글씨는 진나라까지 가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지금은 비의 형체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비문은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남아있다.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시기가 충렬왕 21년(1295)이므로, 부도탑의 건립 역시 일연이 입적한 해인 1289년에서 1295년 사이의 일로 짐작된다. (출처 : 문화재청)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탁본>

 

 

 

 

 

 

 

 

 

 

 

 

 

 

 

 

 

 

 

 

 

 

 

 

 

 

 

 

 

快適須臾意己閑 (쾌적수유의기한)

즐겁던 한 시절 자취 없이 가 버리고

暗從愁裏老蒼顔 (암종수이노창안)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어라

不須更待黃梁熟 (불수경대황량숙)

한 끼 밥 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리

方悟勞生一夢間 (방오노생일몽간)

인간사 꿈결인 줄 내 인제 알았노라

 

인각사 一然스님 시비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의상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어 고려 충렬왕 10년에 왕명으로 크게 중건(重建)되고 토지를 하사하여 보각국사 일연 스님께서 하산소로 정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불교서적 100여권을 저술하였고,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이나 열었습니다. 조선 숙종때 다시 중수(重修)되어 숙종 25년에 당시 의흥 현감 박성한에 의하여 증축되었답니다. 경내에는 중국 왕희지의 유필로 집자한 보각국사 탑 및 비가 보물로, 사찰주변은 사적지 제374호로 지정되었고, 석불상과 부도가 있습니다.

이 곳은 군위군 고로면과 영천시 신령면을 남북으로 가르며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해발 828m의 장엄하고 준수한 태산준령의 화산(華山)에서 서서히 완만한 능선을 이루며, 비단같이 깔리면서 위천 상류를 흐르는 개울가에 이르러 끝을 맺고 있는데 이 개울을 건너면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인각마을입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인각 마을의 내력은 기린이 노닐다가 뿔이 암벽에 걸려서 떨어진 곳이라고 하며, 화산의 화려하고 기품 있고 당당한 모습이 마치 기린의 형상을 닮았으며, 인각 마을의 위치가 그 뿔의 지점에 해당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구전되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길이 없습니다. (출처:군위군청)

 

 

 

 

 

 

 

 

 

 

 

 

 

 

 

 

 

 

 

 

 

 

 

 

 

 

 

 

 

 

 

 

 

극락전 앞 삼층석탑 수리 전

극락전 앞 삼층석탑 수리 전(일제 강점기)

 

명부전

 

 

 

산령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