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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문경

신길원 현감 충렬비(申吉元 縣監 忠烈碑)

노촌魯村 2020. 7. 7. 16:58

신길원 현감 충렬비(申吉元 縣監 忠烈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340-1)

문경세재 제 1관문 주위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임진왜란 때 순국한 신길원 선생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신길원은 선조 때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 후에 태학의 추천으로 참봉을 거쳐 문경현감이 되었다. 현감을 맡아보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공격해오자, 관군을 거느리고 끝까지 항거하다가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왜적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장렬히 순국하였다. 조정에서는 선생을 좌승지로 추증하고, 그 충절을 기리는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비는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숙종 32년(1706)에 세웠다. 현재는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으며, 문경향교 앞에 충렬사를 건립하여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낸 신국량의 아들로 45세에 벼슬길에 올라 선조 23년 경인년(1590)에 문경현감으로 도임하였다. 임진년(1592) 4월 27일 문경을 사수하다가 순국하였다.

임란 때 지방관으로 순국한 이가 많지 않았기에 나라에서는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하여 그의 충렬을 기렸으며 숙종 32년(1706) 비를 세워 충절(忠節)을 표창하였다.

이 비는 화강석으로 지대석(地臺石)과 비신(碑身), 비개(碑蓋)를 만들었다. 비부는 높이 23㎝, 가로 146㎝, 세로 86㎝이며 비신은 높이 190㎝, 폭 89㎝, 두께 27㎝이고 비개는 높이 77㎝, 가로 122㎝, 세로 63㎝이다.

임란 당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상주를 거쳐 문경을 침공하자 현감은 피신하지 않고 문경을 사수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왜적에게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현감은 항복을 거절하고 관인도 주지 않았다. 왜적이 현감의 몸을 수색하자 관인을 오른손에 쥐고 주지 않으므로 적이 장검으로 목을 쳐서 순국하였다. 1706년 3월에 나라에서 비를 세워 충절을 표창하니 비문은 선무랑 전수사간원 정언지제교(宣務郞前守司諫院正言知製敎)인 채팽윤이 지었으며 통훈대부전행성균관전적(通訓大夫前行成均館典籍)인 남도익이 글씨를 썼다. 이 비는 1981년 4월 25일 지방유형문화재 제145호로 지정되었고 신길원은 달성군 공산면의 표충사에 배향(配享)되었다.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도 실려 있다.(출처 : 문경시청)

 

이 비의 당초 건립지는 문경의 비석거리였다고 전하나 알 수 없으며 문경초등학교 교문 곁에 충열각을 세웠으나 허물어지고 비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 제1관문 뒤에 이전하였다가 1981년 제1관 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보호각을 세웠다. 신길원의 관은 평산 (平山)이고 자는 경초(慶初)이며, 도사 국량(國梁)의 아들이다. 효성 이 지극하였으며 선조 병자년(1576)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된 후에 태학(太學)의 추천으로 참봉을 거쳐 문경현감(聞慶縣監)에 올랐다. 현감 재임 중에 임진왜란을 맞아 항거하였으나 중과부적(衆 寡不敵)으로 적군에 포로가 되어 항복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고 장렬히 순절(純絶)하였다. 이 비는 화강암으로 비부 높이 23cm, 가로 146cm, 세로 86cm, 비신 높이 190cm, 너비 89cm, 두께 27cm이고 비개 는 높이 77cm, 가로 122cm, 세로 63cm이다.(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