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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성주

성주星州 선석사禪石寺

노촌魯村 2020. 8. 30. 13:03

 

성주星州 선석사禪石寺

신라 효소왕 때 의상국사(義湘大師)가 화엄 10찰 중 하나로 현재 위치보다 서쪽에 창건하여 절 이름을 신광사(新光寺)라 하였으나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나옹국사(懶翁大師)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선석사라 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전소하여 조선 숙종 10년 (1684)에 혜묵(惠默), 나헌(懶軒) 등이 중창하였으며, 1725년(영조 1년)에 서쪽의 옛터로 이건하였다가 1804년 서윤(瑞允)이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명부전, 칠성각,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세종의 왕자 태실이 있는 태봉에서 약 200m 거리 에 위치하고 있는 이 절은 태실을 보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현존하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집이다.(참고자료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중, 306. ; 성주군)

 

성주 선석사 대웅전(星州 禪石寺 大雄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4호. 경상북도 성주군 세종대왕자태실로 616-33 (월항면, 선석사))

선석사는 통일신라 효소왕 1년(692) 의상대사가 지금의 자리보다 서쪽에 신광사라 이름 지어 세웠다. 그 뒤 고려 공민왕 10년(1361) 나옹대사가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당시에 새로운 절터에서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 닦는다.’는 뜻을 가진 ‘선(禪)’자를 넣어 선석사라 했다. 영조 1년(1725) 서쪽 옛 터로 옮겼다가 순조 4년(1804) 지금 있는 자리로 다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절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칠성각, 산왕각 등이 남아있다.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출처 : 문화재청)

 

성주 선석사 영산회 괘불 (星州 禪石寺 靈山會 掛佛幀. 보물 제1608호. 경상북도 성주군 세종대왕자태실로 616-33 (월항면, 선석사))

1702년(숙종 28) 탁휘(卓輝)·법해(法海)·설잠(雪岑)·성징(性澄) 등이 제작된 괘불탱이다. 화면 중앙에 크게 묘사된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있고, 화면의 상단에는 아난과 가섭, 2명의 제자가 합장한 모습으로 상반신만 표현되었다. 좌우협시는 본존불보다 한 발짝 앞서 겹쳐 표현하여 공간감과 입체감을 드러내고 있다. 본존 석가여래의 수인은 통상의 항마촉지인이나 설법인이 아닌 오른손을 어깨로 들어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그림의 화기(畵記)에 “영산회도일부봉안(靈山會圖一部奉安)”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도상은 선종의 염화시중과 조선시대에 성행한 선교합일(禪敎合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이 작품은 현재까지 알려진 불화 중에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내용을 표현한 불화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선석사 영산회괘불탱은 제작시기가 비교적 빠르고 연꽃을 든 석가여래 도상의 선구적 위치에 있다는 점, 이 그림을 모본으로 하여 예천 용문사 영산회괘불탱(1709년, 보물1445호)가 현존 한다는 점 등에서 불화도상의 계승을 살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색채감각이나 필선이 매우 세련되고 뛰어나 18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괘불화이다.(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