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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포항

포항 장기읍성(浦項 長鬐邑城)

노촌魯村 2021. 6. 3. 07:39
                            

               

포항 장기읍성(浦項 長鬐邑城. 사적 제386호.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 127-2번지 외)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고려 때 처음 이 성을 쌓았는데 동쪽으로 왜적을 막고 북쪽으로는 여진족의 해안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현종 2년(1011) 당시에는 흙으로 성을 쌓았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돌로 성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성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둘레가 1440m이며 3개의 성문과 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작은 성인 옹성, 성벽 바깥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서 만든 치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인 음마지(飮馬池)가 있다. 성 안쪽에는 교육기관이었던 장기향교와 관청이었던 동헌 터가 남아 있는데 동헌은 현재 면사무소 안으로 옮겨 보호하고 있다.

산꼭대기에 있으면서 읍을 다스리는 기능도 갖추고 있는 장기읍성은 읍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출처 : 문화재청)

                                                     

장기읍성은 산성(山城)과 같은 기능을 겸한 읍성으로서 해발 252m의 동악산에서 해안쪽인 동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지맥 정상(해발 100m)의 평탄면에 축성되었으며 형태는 동·서로 약간 긴 마름모꼴이다. 성 전체의 모양은 연잎 모양의 말굽형이며, 180도 시각으로 동해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쌓았다.
고려 현종 2년(1011) 축성되었는데, 당시 고려가 여진족이 해안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토성(土城)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세종 21년(1439)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돌성으로 개축된 후 군사기지 등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태종 15년(1415)에 장기읍성의 지리적 중요성에 따라 수령(守令)의 위계를 사품 이상으로 높여 지현사(知縣事)라 하였다. 이후 세조 6년(1460)에는 독진(獨鎭)으로 바뀌었다가 같은 왕 12년(1466)에 독진(獨鎭)을 파하였다. 뒤에 현감(縣監)으로 고치고 그 밑에 훈도(訓導)를 두었다. 축성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1. 단종 2년(1454)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성의 둘레가 174보(步)이고 성안에 우물이 두 곳이 있다.

2. 예종 1년(1469)에 지은 『경상도속선지리지(慶尙道續選地理志)』에 의하면 세종 21년(1439)에 돌로 쌓고 둘레가 3,664척이고 높이는 12척이며 샘[泉]이 두 곳이며 못[池]이 두 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고, 군창(軍倉)도 있다.

3. 중종 25년(1530)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석축(石築)을 하고 둘레가 2,980척이고 높이는 10척으로 우물이 네 곳이며 못이 두 곳이다. 구 읍성이 현의 남쪽 2리에 있으며 돌로 쌓아 그 둘레가 468척이고 높이는 12척이고 샘이 두 곳 있다.
이상의 기록에서 성의 규모를 보면 모두 다르게 되어 있다. 이것은 같은 위치의 성(城)을 여러 대에 걸쳐 중축(重築)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최소 한 두 개 이상의 성이 있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축성기록 3항의 구(舊) 읍성은 뚜렷이 위치가 다르게 나타나 있는데 지금은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움이 남지만 분명히 고려시대 이전의 고성(古城)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편 이곳은 벽지로 인정되어 귀양지로도 되었으니 유교의 대가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실학파의 태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귀양살이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 고장은 송시열을 기리는 죽림서원(竹林書院)이 세워져 글을 읽는 마을이 되었으며 정치·경제·사회적인 특성이 있는 곳이라기 보다 오로지 국방의 일익을 담당한 군사기지로 그 역할을 다하였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 장기유배문화체험촌 *
포항시 장기면 일대는 조선시대 선비 100여명이 유배를 다녀간 곳으로 유명하며,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과 같은 석학과 거물학자들이 회한의 눈물을 흘렸던 땅이다. 유배인들은 고난속에서도 서책을 탐구하고 시문과 저서를 쓰고 지역 선비들을 교육하며 독특한 유배문화를 탄생시켰다.
* 장기읍성 *
장기읍성은 일찍부터 동해안을 지키는 다른읍성들과 같은 중요한 군사기지로, 장기면 동악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이 있으며, 그 구릉 아래쪽으로는 장기천이 동해로 흘러 현내 들판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향교만이 이 고장 주민들에 의해 복원 유지되고 있고, 성벽은 복원중에 있다.  (출처 : 포항시청 자료)          

동문지(東門址)

 

배일대(拜日臺)
장기들판
장기향교
서문 옹성
서문 옹성 밖
북문
수구(水口)
장기향교(長鬐鄕校)

장기향교(長鬐鄕校.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27호.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성길 92 (읍내리))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장기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자 선조 33년(1600)에 다시 지었다. 정조 9년(1785)에 마현동으로 옮겨지었고, 1931년 군수 김영수가 읍성내에 있던 구객관을 수리하고 위패를 모셔 지금의 향교로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방경·서극인·이대임·이눌 등이 향교에 모시고 있던 위패를 용암석굴에 옮겨 놓아 위패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향교를 옮겨지을 때 덕계 임재화가 대대로 살던 자기 집터를 내놓아 향교 재건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등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과 중국, 우리나라의 성현들을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출처 : 문화재청)

 

대성전
동헌(근민당近民堂)은 현재 면사무소 안으로 옮겨 보호하고 있다.

장기척화비(長鬐斥和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4호.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 107번지)

척화비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 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더욱 강력히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의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비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모습이며, 비몸의 네 모서리와 윗변의 양끝을 단정히 다듬어 놓았다. 앞면에는 비문을 새겨 두었는데 내용에는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는 강한 어투의 경고를 적고 있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이후 같은 해에 일제히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되면서 대부분의 척화비들은 철거되고,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이 곳곳에 남아 옛 역사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원래는 장기읍성 안에 있었으나, 1990년에 장기읍사무소 정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