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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주

별리(別離)-조지훈 : 무섬마을 김성규 가옥(조지훈 처가)

노촌魯村 2023. 11. 25. 09:55

별리(別離)ㅡ조지훈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히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連峰)을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鴛鴦枕)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꺾어서 채찍 삼고 가옵신 님아……

 

조지훈趙芝薰 : 본명은 '동탁(東卓)'으로, '지훈(芝薰)'은 그의 아호이다

1920년 12월 3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서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조헌영과 어머니 전주 류씨 류노미(柳魯尾)(류진희(柳進熙)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했고 1939년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서 '고풍의상(古風衣裳)'이라는 시로 등단했다. 그 외의 작품으로는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 등이 있다.

1946년 박목월, 박두진과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를 민족 주체의 위기로 보고 민족 주체 의식의 확립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민족 전통을 연구하고 그것을 시로 써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서당 교육을 받았고 검정고시를 쳐서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에 합격했으므로 일제식 교육을 일절 받지 않았다.

1941년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부터 사망 시까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고려대학교 교수 재직 당시 지은 고려대학교의 교가와 '호상비문', 이 호상비문에서 따온 민족의 아리아라는 응원가가 고대생들 사이에 사랑받고 있다. 1960년에는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제자들의 4.18 의거를 지켜보고는 같은 해 4월 20일에 지은「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라는 헌시(獻詩)를 고대신문에 투고하여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고려대 교정 내에 있는 4.18 기념비문도 그가 지었으며, 고려대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조론'이라는 수필을 통해 이승만 정권 및 정치인들의 지조없음을 꾸짖은 전례가 있을 정도로 대쪽같은 인물이었다. 후배 문인 중엔 대선배인 서정주보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이승만 정권 때는 민권 수호 국민 총연맹, 공명 선거 추진 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김수영이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적이었다면 조지훈은 그 반대로 세속적인 이해와 타협을 거부했다. 말하자면 과거 조선 시대의 선비 정신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68년 5월 17일 고혈압으로 토혈한 후 입원했으며 기관지 확장증 합병증으로 인해 만 47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1982년 문화의 날을 맞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출처: 나무위키)

무섬 마을 풍경
무섬 마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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