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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석남사

노촌魯村 2006. 3. 13. 13:43

 

이조 제 18대 현종 15년 (서기 1674년) 탁영,선철선사에 의하여 중건되고 다시 또 조선 제 23대 순조 3년(서기 1803년) 침허, 수일등의 선사가 중수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황폐해진데다가 1950.06.25에 일어난 한국전란으로 신라고찰의 모습이 남아있던 것을 모조리 파괴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 후 비구니인 인홍스님께서 주지로 부임해 오자 온통 폐찰이 되다시피 된 석남사를 재건한 것이다 먼저 대웅전, 극락전, 그 밖의 부속시설을 중수중창을 하고나서 그 다음에 종각, 침계루, 심쇄당, 무진료, 상락료등을 신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케 하였다. 석남사는 저 멀리 강원도 태백산맥이 남쪽으로 뻗으면서 줄달음질을 치다가 도중에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산을 형성한 뒤 다시 뻗으면서 고헌산맥을 형성했는데, 이 고헌산맥에는 가지산, 신불산, 간월산, 천황산, 영취산 등의 영산 명봉들을 이루어 놓고 말았다. 가지산에는 석남사, 신불산에는 간월사, 영취산에는 통도사 등의 신라 명찰이 들어 앉게 되었으니 불심과 영통한 법운 영역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일찍이 도의국사는 영산 명지를 찾다가 이 곳 가지산의 법운지를 발견하고 터를 정한 뒤, 신라의 호국을 염원기도하기 위하여 석남사를 창건한 것이다. 도의국사는 신라 제 37대 선덕왕 1년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지장의 제자가 되어 그 불법을 물려 받고 법호를 도의라고 개명한 뒤 821년에 신라로 귀국하였다. 신라에 돌아와서는 남선을 전파시켰으며, 도의의 남선에 의하여 북선과 함께 두줄기 선문이 생기게 되었다. 도의는 돌아온지 3년만에 석남사를 창건하고 가지산파의 개조가 되었다. 이렇듯 유서깊은 석남사에는 건물 이외에도 대웅전, 극락전, 정수원, 강선당등의 건축물이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정조 15년(1791)에 세웠다는 극락전이고 다음 가는 건축물은 순조 3년에 세운 대웅전이다. 이 사찰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부도 1기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 수조등의 귀중한 문화재가 있다. 석남사는 울산사람들에게 늘 열려있는 휴식처의 역할뿐만 아니라, 한겨울 눈이 내려 온 절을 하얗게 만들 때 가지산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는 모습은 어디에 비겨봐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울주군청)

 

 석남사(石南寺)는 가지산(迦智山) 혹은 석안산(石眼山)이라고 하는 산의 남쪽에 있다하여 석남사(石南寺)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 신라 헌덕왕 16년(824년) 도의국사의 창건이래 여러 차례 중건 중수(重建重修)를 거듭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후 1674년 조선 현종 15년 탁영(卓 靈), 선철(善哲)선사(禪師)등에 의하여 중건되었으며 다시 1803년 순조 3년에 침허(枕虛) 수일(守一)선사 등에 의하여 중수되었다.(울주군청)

 

 

 

 석남사는 824년(신라 헌덕왕 16년)에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처음 세웠다고 전한다. 부도(浮屠)는 이름난 스님들의 유골(遺骨)을 모시기 위해 세운 돌탑을 말한다. 이 부도는 높이 3.53m에 이르는 팔각 원당형(八角圓當形)으로 도의국사의 사리탑(舍利塔)이라고 전한다. 1962년 5월에 해체 보수되었는데, 이때 기단 중단석 윗면 중앙에서 직사각형의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하대석(下臺石)에는 사자(獅子)와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중대석(中臺石)에 있는 창모양의 안상(眼象) 속에는 꽃무늬띠를 새겼다. 8판 연꽃좌(蓮花臺座) 위에 놓은 탑몸돌에는 신장(神將)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統一新羅) 말기 부도 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석남사 동북쪽 언덕의 넓은 대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찍부터 석남사를 세운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불려왔다. 전체적으로 8각의 형태을 취하고 있으며, 8각의 바닥돌 위에 기단부(基壇部)와 탑신(塔身)을 놓은 모습이다. 기단부의 아래받침돌은 8각으로 사자와 구름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에는 상·하·좌·우에서 안쪽을 향하여 낮게 솟은 꽃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겼고, 그 안으로 꽃모양의 띠를 둘렀다. 윗받침돌은 연꽃을 새겨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얇게 새겼고, 앞·뒷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그 중 앞면에만 자물쇠가 새겨져 있다. 문의 양 옆으로 신장입상(神將立像)이 배치되어 있다. 지붕돌은 추녀가 짧고 서까래와 기왓골이 상세히 표현되었으며,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차례대로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넓이에 비하여 높이가 높은 부재로 구성되어 길쭉해 보이며, 바닥돌의 폭이 좁아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래받침돌의 구름무늬나 탑신의 신장상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고, 특히 가운데받침돌의 안상조각에서 시대가 내려옴을 볼 수 있으나 각 부분이 완전히 보존된 아름다운 작품이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기단부의 가운데받침돌에서 사리장치를 두었던 공간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치는 남은 것이 없었다(울주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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