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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경주인근자료

경주임난창의공원과 박무의공비

노촌魯村 2006. 6. 1. 14:49

(임란창의공원 :경주 황성공원)

임진왜란은 선조25년(1592)에서 31년(1598)까지 7년 동안 계속된 조선과 왜의 전쟁이다. 전란 내내 경주부는 최전방이었고, 군사상 요충지였기에 피해가 클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임진 4월 왜군이 첫 침입하였을 때도 그랬지만 정유재란의 병화는 더 컸다. 더구나 소위 평화교섭이 진행되던 선조 26년부터 3년 동안에도 타 지역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전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 까닭에 최전선에서 왜적을 맞아야 하는 경주부의 사람들은 다른 지역민들 보다 더 열심히 의병을 조직하여 싸웠다.

 경주 문천회맹 (蚊川會盟)

경주읍성을 탈환하기 위한 문천회맹은 선조 25년(1592) 6월 9일 경주 남천(문천)가에 위치한 월성에서 있었다. 이 회맹은 팔공산, 화왕산 회맹보다 앞선 것으로 임란사에 길이 빛날 것으로 믿어진다. 통문(通文)을 받은 의병들은 문천회맹을 갖기 위해 모이기 시작한다. 당시의 관계기록이 대동소이하나 《동계실기》에 따르면 5월28밀 이언춘은 동해안으로부터 월성으로 진지를 옮겼다. 이때 부윤 윤인함이 곧바로 달려와 격려하였다. 5월 28일 이계수등 10여 의사가 문천에 온 것을 시작으로 6월 5일 이경연등 11인은 울산에서, 정세아등 14인은 영천에서, 김천빈등 8인은 영일에서, 서방경, 서극인, 이대임은 장기에서, 정인수등 11인은 흥해에서, 박희근 등 6인은 양산과 동래에서 각각 왔다. 그 다음날 최계종 등이 정병 300여명을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그리고 6월 7일에는 박의장이 합세하니 4,200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의병군과 관군의 합세로 병세는 매우 강했다.

동계실기 :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일기를 수록한 실기로 5묶음으로 제본했다

회맹(會盟):1. 모여서 맹세함. 2. 왕조 때, 공훈이 있는 사람을 책에 올릴 때에 군신(君臣)이 모여 맹세하던 일.

慶州壬亂義士倡義碑文(경주임란의사창의비문) 내용
조선 선조 25(1592)부터 7년 동안 이 땅을 병화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임진왜란은 우리 나라의 역사상 가장 참혹(慘酷)하고 치욕적(恥辱的)인 전란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 민족은 인적 물적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고 국력이 쇠진(衰盡)되어 그 후 40여 년 만에 또 다시 일어난 병자호란마저 극복하지 못한 체 근 반세기 동안 기한(飢寒)과 질병(疾病)속에 허덕이며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특히 우리 경주는 가장 문물이 번성했던 신라의 고도이며 영남의 웅진(雄鎭)으로서 적의 주력부대가 목표로 삼았던 요로(要路)였기 때문에 그 어느 지역보다 가장 먼저 많은 인명의 사상(死傷)과 재산의 분양을 당해야만 했다. 이 해 41420여만의 대병(大兵0을 동원 부산포에 상륙한 적은 일거에 동래성을 함락하고 언양을 거쳐 경주성을 점령하니 바로 421일이었다. 그들의 본진은 영천을 지나 북진을 계속하고 경주에 유둔(留屯)한 잔당들이 후속 되는 증원병과 합세 갖은 살육과 약탈을 자행(恣行)하자 분기에 찬 우리의 선조들은 백척간두(百尺芋頭)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고 향토를 지켜야 한다는 충의일념(忠義一念)으로 창의의 기적을 높이 들고 일어나 결사항쟁에 나섰다. 그리하여 69일 문천(蚊川)에서 회맹(會盟), 일사보국(一死報國)의 결의를 다짐하고 821일 관군과 함께 경주성 탈환을 위하여 500여명의 전사자를 낸 서천대전(西川大戰)을 치른 뒤 드디어 98일 경주성을 회복하니 이 때 경주인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큰 도움이 되었다. 용맹(忠勇)한 의사(義士)들은 가족과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아니하고 영천복성전(永川復城戰) 팔공산회맹(八公山會盟) 화왕산회맹(火旺山會盟) 등에 연이어 참가하여 신명(身命)을 다하여 항전을 계속 했다. 그러나 정우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던 적이 직산(稷山)에 이르러 명군(明軍)에 대패(大敗)하고 다시 남하하면서 경주에 들어와 저지른 그 만행(蠻行)은 실로 극에 달했다. 살생과 약탈은 물론 아직 성()중에 남아 있던 관아의 건물과 유물 유적들을 모조리 방화 또는 타파(打破)하니 분황사(芬皇寺)30만근으로 주성(鑄成)한 불상이 불과 함께 불타고 9층고탑(九層古塔)이 파괴된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이에 동요되거나 굴하지 않았다. 끝까지 적을 추적하여 울산(蔚山) 도산(島山)에 둔거(屯居)한 적을 조선연합군과 함께 공격하며 혈전(血戰)을 계속했다. 충의(忠義)로운 의사들은 혹은 전사하고 혹은 부상을 당하면서도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모든 전장(戰場)의 선봉(先鋒)에서 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국란을 극복하고 향토를 보존하는데 큰 공적을 남기게 되었다. ! 우리 어찌 이분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 400년이 지난 지금(至今) 때 늦은 감이 없지 아니하나 여기 이 팔척정비(八尺貞碑0에 경주출신 의사는 물론 경주전역(慶州戰役)에 참전한 지휘관 및 각읍(各邑) 의사(義士)들의 방명(芳名)을 정성껏 새기고 아울러 별도의 창의록(倡義錄)에 그 사적을 소장하게 수록(收錄)하여 자손만대로 추모(追慕)하며 귀감(龜鑑)을 삼으리라.
上記 碑文 長鬐壬亂義士 登載芳名
竹溪 李大任
直齋 徐方慶
徐克仁

(박무의공비:경주황성공원) 

박무의공비(경상북도 경주시 황성공원)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박무의공의 이름은 의장(毅長)이다. 본관 무안(務安). 자 사강(士剛). 시호 무의(武毅). 김언기(金彦璣)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과 함께 경주 탈환 작전에서 화차(火車)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하여 적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 전공으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하였으나 재임중에 임지에서 61세로 죽었다. 호조판서가 추증, 영해(寧海)의 정충사(貞忠祠)에 배향되었다.
조선 선조(宣祖) 10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경주판관으로 빼았겼던 경주성 탈환전에 참전하여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어 7년 동안이나 경주에서 왜적의 침입을 격퇴했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경상좌절도사로 임명하였다. 박의장은 그 후 불운하게도 영중(營中)에서 생애를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후 조정에서는 '무의공(武毅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철종(哲宗) 12년(1816)에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22.3m 두께34cm의 비를 이곳에 세웠다.

비격진천뢰

조선 선조 때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는 인마살상용(人馬殺傷用) 폭탄으로 조선 중기에 사용되었다. 지름 21㎝, 둘레 68㎝로 도화선을 감는 목곡(木谷), 목곡이 들어가는 죽통(竹筒), 얇은 철 조각, 뚜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면은 무쇠로 둥근 박과 같고 내부는 화약과 얇은 철 조각들로 장전하게 되어 있으며, 화포의 일종인 완구(碗口)를 이용하여 발사된다. 임진왜란 때 경주 부윤이었던 박의장이 사용하여 경주성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이장손(李長孫) 
선조 때에 군기시(軍器寺)에 소속된 화포장(火砲匠)으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제작하여 왜적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특히 이장손은 비격진천뢰의 폭발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목곡(木谷)을 발명, 집어넣음으로써 더욱 효과적인 공격무기가 되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병마사 박진(朴晉)은 경주싸움에서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에는 "진천뢰는 이장손이 창안한 것이다. 대완구포(大腕口砲)로 쏘아서 5,6백보 밖에 떨어지게 하고, 떨어진 지 잠시 후에 터지게 만든 것으로서 적들이 가장 두려워하였다."고 하여 비격진천뢰의 우수성을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