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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비슬산(소재사,암괴.대견사지.용봉석불입상)

노촌魯村 2006. 10. 28. 22:17

 비슬산 자연휴양림 입구

 

 비슬산 휴양림의 계곡

 소재사 앞 돌탑

 소재사 일주문

 

 소재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나 자세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1358년(공민왕 7년) 진보법사(眞寶法師)가 중창하였으며 그 후 몇차례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찰은 비슬산을 배산하여 서향으로 좌정하고 있으며 일주문을 비롯해 대웅전, 명부전, 산신각, 요사채 등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은 전면 3칸, 측면3칸의 다포계 맞배집으로 평면은 정면과 측면의 어칸을 협칸보다 넓게 잡아 통칸으로 구성하고 어칸 뒤편에 불단을 배치하였다. 창호는 정면 어칸은 4짝 여닫이문, 양 퇴칸은 2짝 여닫이문, 측면과 배면 양 퇴칸에는 2짝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있어 조선 중기의 창호구성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의 중건, 중소와 해체 보수로 부재의 일부가 교체되기는 하였으나 사찰의 일반적인 법당형식을 잘 갖추고 있고 외관 구성이 단정하며 부재의 결구 등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특히 이 건물의 창호구성이나 다포양식으로 꾸민 두공의 형태 및 구성수법, 정면성을 강조하는 외관 구성수법 등에서 조선 중기의 시대적 상황과 양식적 특성을 살필 수 있어 건축사의 자료적 가치가 있다. (달성군청자료에서)

 소재사 대웅전 내부

 소재사 대웅전 내부

 소재사 명부전

 소재사 목조지장보살좌상은 1675년(숙종 원년)에 조성되었으며 1741년(영조 17) 3월 20일에 중수개금을 시작하여 4월 8일에 마쳤다고 복장기(服藏記)에 적고 있다. 2000년 7월 23일 다시 개금하였다. 재질은 적송으로 전체적인 모습은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중생을 굽어 살치는 듯한 자세로 결과부좌를 하고 있다. 단정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있고 위엄과 자비를 갖춘 자세로 머리는 소발이며 튀어나온 눈, 메부리 모양의 코, 약간 짧은 목을 하였으며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린 어개선의 옷 주름과 목의 삼도와 손바닥의 손금까지 표현할 정도로 사실적이며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목조금칠지장보살좌상으로는 매우 장대하며 조선 중기에 조성된 불상임에도 조선 전기의 양식도 일부 간직하고 있다. 현재 명부시왕과 함께 명부전에 모셔져 있다(달성군청자료에서)

 명부전 내부 시왕

 명부전 내부 시왕

 소재사 삼성각

 소재사 삼성각의 산신탱화

 소재사 삼성각의 나반존자 탱화

 소재사 삼성각 내부 용왕탱화

달성비슬산암괴류(達城琵瑟山岩塊流.천연기념물 제435호)

비슬산 암괴류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10만년 전인 주빙하기 후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중생대 백악기의 화강암 거석들로 구성되어 특이한 경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발달규모가 대단히 큰 것으로 화강암 지형에서는 보기 드물고 가치가 매우 높은 지형이다. 암괴류 상부는 비슬산 대견사지(大見寺址) 근방, 하부는 고도 450m 부근인 소재사(消災寺) 남쪽 근방이다. 토르가 잘 발달한 대견사지 부근에는 부처바위 등 기묘한 모양의 바위들이 분포하고 있고 칼바위는 애추(崖錐,talus 혹은 scree)(풍화된 암설(岩屑)이 중력의 작용으로 급사면에서 떨어져 내려가 퇴적한 반원추형(半圓錐形)의 지형)의 형성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비슬산 암괴류와 그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지형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중요한 학술적 연구대상이 된다. (달성군청자료에서)

 

 

 

 

 

 

 

 

 

 대견사지 삼층석탑(대견사지 계곡 어느 곳에서 보임)

 

 대견사지

 대견사지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42호)

소 재 지 : 대구 달성군 유가면 용리산 1

시 대 : 신라 헌덕왕

비슬산 주봉에서 남쪽으로 약 2km 해발 1,000여m에 위치한 이 탑은 중국 당나라의 황제가 절을 짓기 위하여 찾아 헤매다 9세기 신라 헌덕왕 때 이곳 비슬산에 절과 삼층석탑을 건립하고 대국에서 본 절이라하여 대견사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현재 절은 임진년 조일전쟁 때 허물어져 버리고 빈터에 주춧돌과 석축만이 남아있으며 삼층석탑도 허물어져 있는 것을 달성군에서 1988년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달성군청자료에서)

절터에 흩어져 있던 탑재들을 모아 1988년 복원했는데, 절벽의 높은 바위를 바닥돌로 삼아 그 위에 기단과 탑신을 올려놓은 것이 특징이다.

 

 대견사지

삼층석탑에서 본 대견사지

 대견사지의 축대(그 옛날에 어떻게 작업을 하였을까? 참으로 신기하였다.)

 대견사지의 부처바위(역광으로 보니 참으로 장관)

 

 대견사지의 샘

 대견사지의 바위에 있는 선각(무슨 의미일까? 그 옆에 페인트는 왜 칠했는지? 궁금)

 

 대견사지의 코끼리 바위

 대견사지의 토르

 대견사지의 삼층석탑 옆의 인공 석재(용도는?)

 

 

 대견사지 능선 뒷편의 참꽃 군락지(꽃피는 철에는 장관, 꼭 꽃이 필 때 왔야지!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비슬산 정상)

 대견사지의 와편

 임도에서 본 대견사지

 

 비슬산의 애추(석검봉)

 비슬산의 단풍

 달성 용봉동 석불입상

소재지 : 달성군 유가면 용봉리 산 2-1(비슬산)

유형문화재 제35호(신라하대작으로 추정)

비슬산(琵瑟山) 일원에는 신라시대 이래의 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는데 용불동석불입상이 있는 곳도 그 중의 하나로서 석불과 기와조각만이 산재할 뿐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석불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한쪽 면에 광배와 양각의 서있는 불상을 조성했던 것으로서 왼손에 약호를 든 약사여래이다. 불상은 약식화 된 연화대 위에 조각한 것으로 하부의 표현은 빈약하나 머리는 소발에 큼직한 상투 모양의 육계가 있는 풍만한 상호가 나타나 있다. 양 어깨에 모두 옷을 걸친 통견의 법의를 입고 있다. 주형광배는 원형의 두광과 가는 타원상의 신광을 도드라진 선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불상과 광배의 이러한 조성기법은 통일신라 하대의 수법을 계승한 것이다.

 

 

 

 발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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