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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천

환구세덕사(環丘世德詞)

노촌魯村 2009. 8. 6. 22:54

 

환구세덕사(環丘世德詞 민속자료 제87호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768번지)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영천의병장인 호수(湖叟)정세아(鄭世雅)(1553-1612)선생과 아들 백암(栢巖)의번(宜藩)(1560-1592)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정조1년(1777)서재(書齋)뒤에 충현사(忠賢詞)를 지어 향사(享祠)하고 강학의 도장으로 사용하여 왔다. 그 후 의번공의 충효정려(忠孝旌閭)가 내려 사당 좌측에 충효각이 세워졌다. 그러나 5년(1868),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철거되어 그 유지(遺地)에 충효각과 부속건물 2동만 남아 있다. 의번공은 경주복성전에서 왜적에게 포위되자 아버지를 구출하고 장열히 전사(戰死)하였다.(영천시청 자료)

정의번(鄭宜藩): 1560~1592년(선조18) 자(字)는 위보(衛甫), 호(號)는 백암(栢巖). 호수 정세아(鄭世雅)의 아들. 1585년(선조1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永川)에서 승리, 이어 경주에 진격하여 싸우다가 적에게 포위당해 위기에 빠진 아버지를 구출, 혈전을 벌리다 전사했다 바로 임진년(1592) 8월 20일이다. 호수공(父)이 사후에, 공이 평소 입던 옷과 갓으로 경주 싸움터에 가서 초혼해 와서 빈소를 지어 통곡하고 또 당시에 서로 마음을 통하던 지우들에게 애사(哀詞)를 구해서 관에 넣어 시체 대신 선영의 곁에 장사 지내니 이것이 이른 바 기룡산(騎龍山)기슭의 시총(詩塚)이다. 그 후 서기 1784년(정조 8년) 2월에 "충효각"을 영천군 임고면 선원동(永川郡臨皐面仙源洞)에 왕명으로 세우게 되어 오늘에도 그 충효를 경모하게 되었다영조 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영천(永川)의 환고사(環皐祠)에 제향되었다.

 

   

 

정충각

서기 1784년(정조 8년) 2월에 "충효각"을 영천군 임고면 선원동(永川郡臨皐面仙源洞)에 왕명으로 세우게 되어 오늘에도 그 충효를 경모하게 되었다. 영조 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영천(永川)의 환고사(環皐祠)에 제향되었다.

 

 

 

 영천(永川)의 환고사(環皐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永川)에서 승리, 이어 경주에 진격하여 싸우다가 적에게 포위당해 위기에 빠진 아버지를 구출, 혈전을 벌리다 전사했다 바로 임진년(1592) 8월 20일이다. 호수공(父)이 사후에, 공이 평소 입던 옷과 갓으로 경주 싸움터에 가서 초혼해 와서 빈소를 지어 통곡하고 또 당시에 서로 마음을 통하던 지우들에게 애사(哀詞)를 구해서 관에 넣어 시체 대신 선영의 곁에 장사 지내니 이것이 이른 바 기룡산(騎龍山)기슭의 시총(詩塚)이다

 

 시총(詩塚)

영천지방 3대 길지로 꼽히는 명당 중 하나인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기룡산 자락의 정씨 문중 묘역(클릭하시면 원본크기의 사진이 나타납니다.다음지도스카이뷰에서 캡쳐하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