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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광한루원(廣寒樓苑.명승 제33호). 광한루(廣寒樓.보물 제281호)

노촌魯村 2010. 3. 23. 19:22

 

 

 

 

광한루원(廣寒樓苑.명승  제33호.전북 남원시  천거동 78번지 등)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후 ‘광한루’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날 단 한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으며,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은하수 연못 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방장·영주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이란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구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를 건립하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춘향제가 열린다(문화재청 자료)

 

 

 

 

 

광한루(廣寒樓.보물  제281호)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자연과 어우러져 쉴 수 있도록 경치 좋은 곳에 지은 건물을 말한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이름난 황희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고 한다. 광한루(廣寒樓)라는 이름은 세종 16년(1434) 정인지가 고쳐 세운 뒤 바꾼 이름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년(1638) 다시 지은 것으로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운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는데, 여름에는 사방이 트이게끔 안쪽으로 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또한 누의 동쪽에 있는 앞면 2칸·옆면 1칸의 부속건물은 주위로 툇마루와 난간을 둘렀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뒷면 가운데 칸에 있는 계단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곳으로 넓은 인공 정원이 주변 경치를 한층 돋구고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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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의 최고 수혜자 남원 광한루   

 이원호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서양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견줄만한 우리 것은 단연코 춘향전이다. 조선후기 작자미상의 판소리와 소설로 전래되면서 근대시기를 거쳐 현재까지도 대중들의 사랑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소설 말미에 과거급제 사실을 속인 채 춘향이를 구해내는 극적 반전과 광한루(廣寒樓)와 오작교(烏鵲橋), 그네 등 소설 속 무대가 되었던 곳들도 제법 인기를 끄는 데 한몫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황희 정승(1363~1452)이 남원으로 유배오면서 건립된 광통루(廣通樓)가 광한루원(廣寒樓苑)의 전신에 해당한다. 이후 전라감사 정철과 남원부사 장의국이 부임하면서 광한루를 중수하였는데, 요천강을 끌어 호수를 파고 삼신산과 오작교를 조성함으로서 정원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1444년에는 남원부사 유지례에 의해 당시 황무지였던 광한루 경계 밖 서남쪽에 밤나무숲도 조성되었다.

오늘날 광한루원은 명승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광한루의 모습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정말 이도령은 춘향이가 광한루에서 그네타는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을지 월매집이었던 곳은 어디일지 한번쯤은 상상해 봄 직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지금의 광한루가 남아있게 된 결정적 사건으로 광한루 보다 훨씬 나중에 등장한 춘향전(春香傳)’ 덕을 톡톡히 봤다는 것이다.

2014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명승팀은 광한루원 주변의 경관 변화과정과 그 요인을 시대별 지적도를 통해 추적한 바 있다. ‘광한루원이 지금의 영역을 가지게 된 것은 1930년대 주거밀집지역에 둘러싸여 퇴락했던 광한루를 재건하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춘향의 정렬을 기념하기 위해 광한루를 개축 시공한다는 신문기사(1934.9.11.동아일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한루를 그저 춘향전 이야기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이 아닌 춘향전의 장소성을 가진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당시 광한루 공사자금을 마련하는 데는 남원 유지들의 기부 외에도 최봉선을 위시한 기생들이 모금한 성금 이천원을 선뜻 내놓는 일도 있었다. 이후로 광한루 지역은 누각 인근의 민가와 시장, 학교부지 등을 지속적으로 편입시키면서 조선시대 역사경관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건물이 보수되고 정원공간도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마주하는 문화재들은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그때마다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가치기준에 따라 남겨지거나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조선시대 역사적 건물인 광한루가 오히려 이를 통해 파생된 춘향전이라는 대중적 인기현상에 힘입어 주변 경관까지 올곧이 보존하게 된 역사적 사실은, 문화재를 지키는 힘은 곧 유산의 가치인식에 대한 저변 확대라는 것에 출발점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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