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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벽암국일도대선사비(碧巖國一都大禪師碑)

노촌魯村 2013. 11. 24. 16:07

 

벽암(碧巖) : 1575(선조 8)~ 1660(현종 1). 조선 중기의 선승(禪僧)·승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과 함께 참전했다. 이때 함께 참전했던 명나라 장수 이완성(李完城)이 선수와 각성의 사제관계를 명나라의 불도징(佛圖澄)과 도안(道安)에 비유하여 찬탄하기도 했다. 그뒤 스승과 더불어 지리산으로 옮겨 수행했다. 1600년 지리산 칠불사에서 스승을 대신해 26세의 나이로 강석(講席)에 올라 강론했는데 내용이 깊어서 좌중들이 기뻐했다. 1612년 선수가 광승(狂僧)이라는 무고(誣告)로 투옥되어, 광해군으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았으나 죄가 없음이 밝혀져 곧 풀려났다. 그뒤 광해군은 각성을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으로 머물게 했으며 많은 물품을 주었다. 이때 많은 사대부들과 교유를 가졌다.

1624년(인조 2)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되어 전국에서 의승군(義僧軍)을 소집하고 이들을 지휘·감독하여 국가의 보조 없이 3년 만에 성을 다 쌓았다. 이 성은 수도권 호위에 적절한 산성(山城) 요새로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는 의병훈련장이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국왕과 대신 및 일반 서민까지도 이곳으로 피신했다. 성을 쌓은 공으로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직함과 의발(衣鉢:가사와 바리때)을 하사받았다. 1632년에는 화엄사를 수리해 큰 절로 만들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을 비롯한 종친과 대신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자 전국 사찰에 "우리(불교인)는 나라의 국민이요, 더구나 널리 중생을 구제함을 근본이념으로 삼고 있다. 나라가 위급하니 앉아서 보지만 말고 군복을 입고 일어서자"는 격문을 돌리고 의승병(義僧兵)을 모집했다. 의승군 3,000명이 모이자 이를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지었는데, 호남의 관군과 비슷할 정도로 그 세력이 컸다. 그러나 남한산성으로 북진하던 도중에 화의(和議)가 이루어져 전쟁이 끝나자,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1640년 봄 쌍계사를 중수했으며, 그해 8월에 호남관찰사 원두표(元斗杓)의 진언으로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의 직을 맡아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으면서 사고(史庫)를 보호했다. 1641년 해인사에 있을 때 조정에서는 그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고자 했다. 서울로 가던 도중에 병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백운산 상선암(上仙庵)에 기거했다. 1642년 보개산에 들어가서 법석(法席)을 베풀었다. 이때 왕자였던 효종은 그를 만나 화엄종지(華嚴宗旨)를 배웠다. 1646년 가을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熙彦)과 은거했다.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에서 기거하다가 제자들에게 "도업(道業)에 힘써 국은에 보답할 것"과 "사후에 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한 뒤 입적했다. 이때 나이는 86세였다.(출처 : 브리태니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