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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孫良源牧師殉敎記念館)

노촌魯村 2015. 2. 8. 18:44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孫良源牧師殉敎記念館.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3-207[산돌길 70-62])
손양원(孫良源.1902 - 1950.9.28) : 경남 함안군 칠원면에서 손종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일 합방 이후 일제가 동방요배를 강요하자 신앙의 정신으로 불복종하다가 간신히 칠원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인 1919년에 서울 안국동에 있던 중동학교(지금의 중동고등학교)에 진학하게된다.

1938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뒤 전도사가 되어서 1939년 전남 여수시에 있는 애양원 교회에 재직했다.

1940년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체포되어 1945년 8.15해방 때까지 수감 생활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목사가 되어서 다시 애양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다.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 때 큰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두 아들의 죽음이었다. 손양원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 학생은 우익 학생 단체 중 하나인 전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반란 당시 반란군 세력이 이를 빌미 삼아서 두 사람을 살해했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손양원목사는 실제로 이를 실천했다. 반란이 진압된 뒤 반란군 인사 중 안재선이란 사람이 손 형제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자, 손 목사는 안재선 씨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것이다.  
1950년 6.25사변이 터지고 인민군이 호남 지역으로 진격해 오자 모두들 피난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손양원 목사는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다며 끝까지 애양원에 남았다. 당시 환자들은 한센병 환자인 자신들을 북한군이 해치지는 않을테니 손 목사에게 떠나라고 종용했으나 이를 듣지 않았고, 여수로 진격한 북한군에게 붙잡혔다.

북한군에게 붙잡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금되어 있을 때에도, 식사 시간때마다 들어오는 주먹밥 중 가장 작은 것을 집어먹었고 그마저도 반으로 쪼개서 감방의 사람들 중 가장 굶주리고 있던 사람에게 "나는 본래 소식가라서 이것만으로도 족합니다."라며 나눠주곤 했다고 한다.

인민군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같이 갇혀있던 사람들과 함께 1950년 9월 28일 총살당했다. 이때 인민군들이 총을 쏘던 순간 탈출한 김창수에 의하여 손양원목사의 행적이 세상에 알렸다.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孫良源牧師殉敎記念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