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대구

애국의 길 국채보상운동(국립대구박물관 기획전 2015.7.14 - 9.6)

노촌魯村 2015. 7. 25. 06:47

 

 

    

전시기간: 2015년07월14일~2015년09월06일

1907년 대구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과 관련한 주요 자료를 엄선해 전시한다.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이번 특별전을 통해 110여 년 전에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 광문사터

 

 

 

 

 

광문사터의 현재의 모습(대성사라는 절이 있음)

 광문사터가 있는 거리(북성로. 수창초등학교 부근)

광문사터의 스카이뷰(다음 지도 스카이뷰에서)  위의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 

광문사가 있던 북성로 거리(일정시 사진)

광문사가 있던 북성로(대구 원정1정목) 거리(일정시 사진)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대구의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석람 김광제는 1866(고종3년) 7월 1일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평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유년시절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하고, 1888(고종25년)에 병조 효력부위에 제수되어 통훈대부 훈련원 검정의 관직을 지냈다. 1902년*광무6년) 10월에는 정 3품 통정대부를 거쳐 호남시찰사 및 동래경무관을 역임하였다. 일본은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고 1905년에 경성의 경찰치안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왕궁마저 일본곤의 수비를 맡게 되자 경무관이던 김광제는 분연히 사직하고 12월에 고종황제 앞으로 친일배와 내정부패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간계에 몰려 오히려 고군산도로 유배를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우국충절이 밝혀져 2개월만에 특별사면 되었다. 1907년 2월 그는 대구로 내려가 광문사라는 인쇄소겸 출판사를 건립하였다. 이처럼 석럼은 출판을 통하여 한국 민족에게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고 계몽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의 침략상이 노골화되자 1907년 서상돈(徐相敦) 등과 국채보상회(國債報償會)를 조직하였으며, 전국민이 3개월간 금연(禁煙)한 돈으로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일본에서 차관한 1,300만 원을 갚고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 민족의 자주성을 찾자는 운동을 벌였다.(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자료)

 

자와 호는 알수없고, 본관은 달성인데 1866년(병인 고종3) 병인사옥(병인교란)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대박해를 받아 참살을 당하였을때 겨우 박해를 면하여 신자들의 일부는 전라도로, 또한 그 일부는 경상도로 피난하였다. 그때 서상돈은 서울에서 그의 백모의 등에 업혀 대구로 피난하여 왔다고 한다(서석근씨 증언) 서상돈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대구지방에 첫 천주교 신부로 임명된 김보록(로벨드) 신부를 통해서 더욱 신앙을 두터이 하는 한편, 그를 통해서 또한 중국 등지에서 상거래를 활발히 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서상돈에게는 병조, (대륜학교 설립자), 병주, 병민의 세아들이 있었고, 대구대학교(구 한사대학) 대학원장 서정덕 씨는 병주의 장남으로 그의 손자가 된다. 그는 1866년(고종 3) 병인박해 때 신앙문제로 문중에서 쫓겨난 이후, 1871년부터 대구에서 지물행상 및 포목상을 시작하였다. 1886년경에는 상당한 재벌로 부상하였으며, 이후 정부의 특명으로 경상도 시찰관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대구교회 Robert A. J 김보록(金保祿) 신부를 중심으로 교회발전에 힘썼으며, 시찰관에서 퇴임한 뒤에는 실업계의 중진으로 대구의 경제권을 좌우할 만큼의 갑부 반열에 들었다. 그 뒤 대구교구가 설립되자 이의 발전에 힘쓰는 한편, 성직자 돕기와 수녀보호에 솔선수범하였다. 한편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이의 수호에 앞장선 독립협회의 주요 주도회원으로 활약하였는데, 독립협회 제4기 민중투쟁기에는 재무부과장 및 부장급의 일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07년 2월 16일 대구광문사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1,300만환을 보상할 것을 제의하였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자료)

 

 국채보상운동의 거장 서상돈 고택

 

 

 

 

 국채보상회 취지서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의 대개와 의지를 표명한 취지서로, 말미에 청송 대소양인들에게 참여를 권장하고 있다. 필자는 미상이다. 

국채보상회 사통 및 취지서

국채보상회 회장 심호택이 청송 부서면 회장에게 취지서를 각동 주민들에게 전달하고 협조를 구하라는 내용이다. 

 국채보상회 상채회 취지서

경북 청송군 국채보상회 회장의 명으로 각 상채회 회장들에게 보내진 통문이다. 

 국채보상지회의금 모집 발문

경남 칠원의 국채보상운동자료로 국채보상 지회의연금을 모집하는 발문인데 뒤에 한글본이 첨부된 점이 특이하다. 5개의 조약과 군수가 회장으로 되어있다.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 규정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 규정으로 총 30조의 상세한 운영관리 규정이다. 임원 중 소장은 전임판서 김종환이 맡고 있으며 임원수도 40여명의 전직관료가 많이 참여하고 있다. 맨 뒤에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의 인장이 찍혀 있다. 

국채보상금연조성책

국채보상에 참여하면서 금연을 조건으로 의연금을 보조한 사람들의 명단과 성금액을 기록한 성책임. 모두 30명으로 보조금 총액은 67량여이고, 일부 미봉도 표시하였다. 말미에 강동면 사곡동의 재무 이석한과 호수가 기록되어 있다. 

국채보상성책

경북 상주군 외서면 이하리의 국채보상운동에 출연한 인명과 출연 금액을 성책한 것으로 동면 유천동과 짝을 이루며 국채보상운동의 마을 단위 전개 과정과 참여 모습을 전해준다.

 

국채보상 영수증

안씨 종중에 국채보상운동 찬조금으로 10냥을 의무소에 납부하고 받은 영수증으로 1907년 3월에 작성된 문서이다.

 

 

 

 

 

 

 국채보상운동기념비

                                                                                             대구시민회관 주차장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