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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태백 구문소 전기고생대 지층 및 하식지형(太白 求門沼 前期古生代 地層 및 河蝕地形)

노촌魯村 2018. 5. 2. 17:44



구문소 옆 35번 국도(태백로) 도로변(행정상 강원도 태백시 동점동)


태백 구문소 전기고생대 지층 및 하식지형(太白 求門沼 前期古生代 地層 및 河蝕地形. 천연기념물 제417호. 강원 태백시 동점동 산10-1번지 등 )

태백 구문소(求門沼)는 석회동굴의 땅위에 드러난 구멍을 통해 철암천으로 흘러들어오는 황지천 하구의 물길 가운데 있다. 구문(求門)은 구멍·굴의 옛말이며 ‘굴이 있는 늪’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태백 구문소 부근의 석회암에는 건열, 물결자국, 소금흔적, 새눈구조 등의 퇴적구조와 삼엽충, 완족류, 두족류 등의 다양한 생물화석이 나오고 있어 전기고생대의 퇴적환경과 생물상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또한 동굴을 관통하며 흐르는 황지천 하류의 물길은 현내천과 함께 하천 물길의 변천을 연구하는데 학술상 매우 흥미로운 곳이다. 구문소는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고문서에 천천(穿川:구멍 뚫린 하천)으로 기록이 남아 있으며 다양한 전설과 함께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태백 구문소의 고환경 및 침식지형은 퇴적구조, 침식지형 등 다양한 지형, 지질 특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기고생대의 고환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출처 : 문화재청)




 

 

 




 






 


子開門(자개문)


五福洞天子開門(오복동천자개문) 암각문

洞天(동천) : 하늘과 통하는 신선이 사는 세계, 즉 산과 내(川)로 둘러싸인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

子開門(자개문)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낙동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이상 갈수 없는 곳에 커다란 석문(石門)이 있는데, 이 석문은 밤 자시(子時)가 되면 열리고 밤 축시(丑時)가 되면 닫히는데, 자시에 석문이 열릴 때 얼른 그 안으로 들어가면 전쟁과 굶주림이 없는 오복동(五福洞)이라는 이상향(理想鄕)이 나온다고 한다.



 

1937년 일본인들이 구문소 옆에 자동차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뚫어놓은 인공석굴로 지금은 남에서 북으로 향하는 차량이 사용하고 있으며 장성에 탄광이 개발되면서 개설되었다. 석굴 상단에 새긴 우혈모기(禹穴伴奇)도 이때 써 놓은 것이다.


 禹穴侔竒(우혈모기) : 중국 하나라 우임금의 동굴과 기이하게 비슷하다. 1937년에 새겼다고 한다.

 




건열구조가 남아있는 바위

두족류 및 부족류의 화석이 남아있는 바위

물결흔이 남아있는 바위

새눈구조가 남아있는 바위

소금흔이 남아있는 바위

 스트로마톨라이트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의 화석





























































타르보사우르스 알 모형(중생대 백악기. 이탈리아)



구문소 용궁 전설

  옛날 동점 구문소 옆에 엄종한이라는 사람이 노부모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매일 구문소에 나가 그물로 고기를 잡아 노부모를 봉양하였다. 어느날 그물을 쳐놓은 곳에 가보니 그물이 없어져 버렸다. 엄씨는 이리저리 그물을 찾다가 실족하여 그만 물에 빠져 버렸다.



  얼마후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곳에 와 있는데 그곳은 구문소 밑에 있는 용궁으로 용왕이 사는 곳이었다. 용궁 군사들에게 잡혀 용왕에게 끌려간 엄종한은 용왕에게 문초를 받게 되었다.   

  ."네 놈이 엄종한이냐?"
."예"   "너는 무엇 때문에 남의 닭을 잡아가느냐?"
."소인이 어찌 용왕님의 닭을 잡아 가겠습니까, 그럴리 없습니다."
."저놈이 발칙하게 거짓말을 하는구나, 네 놈이 아침 저녁으로 잡아가는 닭을 아니 잡아 갔다니 고얀놈!" 엄종한은 그동안 자기가 잡은 물고기가 용궁의 닭이었음을 간파하고 얼른 머리를 조 아리며
"용왕님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오나 그것은 모르고 한 짓이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소인에게는 늙으신 부모님이 계시는데 농토는 적고 식구는 많아 살림이 어려운 지라 그만 용왕님의 닭인줄 모르고 그것을 잡아 부모님을 봉양하였사오니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요." 하였다.

  그러나 용왕님의 화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삼일 동안 잘못을 비니 그제야 용왕님이 노여움을 풀며 "그래 듣고 보니 그대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로다. 모르고 한 짓이니 차후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 하며 주연을 베풀어 위로하였다. 용궁의 산해진미를 맛보고 융숭한 대접을 받던 엄씨는 집에 두고 온 부모님과 자식 생각이 나서 먹던 떡 한조각을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주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용왕이 흰 강아지 한마리를 주며 강아지 뒤를 따라 가면 인간 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강아지를 따라 물 밖으로 나오니 강아지는 죽어 버렸고 구문소 가에는 무당의 굿소리가 어지러이 들려왔다.

  그때 무당이 구문소 엄씨의 넋을 건지기 위해 닭을 물에 집어 던졌으나 죽지 않기에 살아 있다고 하였다. 그럴때 물밑에서 엄씨가 살아나온 것이다. 모여섰던 사람들은 귀신이 나왔다고 혼비백산하였으나 엄씨는  
"나요. 엄종한이요. 귀신이 아니요." 하였다.

  늙으신 어머님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내 아들이라 하였다. 엄씨가 용궁에서 용왕에게 3일 동안 빌며 보낸 시간이 지상에서 3년이란 세월이 지나간 것이 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니 집안에는 웃음꽃이 피었지만 가난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엄종한은 용궁에서 가져온 떡이 생각나서 주머니에서 꺼내어 보니 떡은 손가락 자국이 남아있는 그대로 굳어 딱딱한 차돌이 되어버린 뒤였다. 엄씨는 그 돌을 무심코 빈 쌀독에 넣어 두었다. 다음날 아침 엄씨의 아내가 쌀독을 열어 보니 쌀독에는 쌀이 가득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엄씨의 아내는 쌀을 바가지로 퍼내 보았으나 쌀독의 쌀은 줄지 않고 그대로였다. 아무리 쌀을 퍼내도 줄지 않는 쌀독은 화수분이 되어 있었다.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된 엄씨네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 때 한양조씨에게 시집간 딸이 경북 대현리의 배지미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친정 아버님이 용궁갔다 와서 부자가 됐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쌀독 속에 넣어둔 백병석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을 알게 된 딸은 친정 어머니에게 잠시만 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알면 큰일나니 안된다고 하였다. 하도 며칠만 빌려 달라는 딸의 간청에 못이겨 친정 어머니는 엄씨 몰래 백병석을 빌려주고 말았다. 얼마후 집안의 가세가 기울자 이상히 여긴 엄씨가 백병석을 찾았으나 딸이 가져간 뒤였다.

  친정 어머니가 딸의 집에 가서 백병석을 달라고 하였으니 번번히 가짜 백병석을 내놓았다. 일설에는 조씨가 엄씨집에 처가살이를 하였다고 하며 백병석을 훔쳐 대현리에 살다가 처가집에서 자꾸 백병석을 찾으러 오니 안동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대현리에 살던 딸이 친정 부모 몰래 백병석이 들어있는 쌀독을 훔쳐 이고 구문소 앞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백병석은 다시 용궁으로 돌아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쨌든 조씨네는 백병석을 자기고 안동 땅 모시밭으로 이주하여 잘살게 되었고 엄씨네는 몰락하고 말았다. 조씨네가 이주한 곳은 안동군 서후면 저전리 일대인데 그곳에는 조씨네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용궁석은 하나가 아니고 조씨 성을 가진 모든 집안에 용궁석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처음 용궁석(백병석)을 가지고 있던 엄씨의 사위 조씨에게는 자식이 여럿 있었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용국석 때문에 형제들 사이에 싸움이 날 것 같으니 개울가에 나가 동그란 돌을 하나 주워다가 분가하는 아들들에게 용궁석이니 잘 간직하라 하였다. 아들들은 자기에게 준 돌이 진짜 용궁석인줄 알고 소중히 보관하게 되었고 그 사람들이 또 자식에게 그런 식으로 용궁석을 물려주니 지금에 와서 용궁석 이 수십 수백 개가 된 것이다.

  엄종한이 용궁을 다녀올 때 흰강아지를 따라 나왔는데 그 강아지가 물밖에 나오자 죽어버려 구문소 안쪽 둔산이라는 곳에 묻었다고 하는데 삼형제폭포 윗쪽 강건너라 한다. 엄종한은 메밀뜨리 건너편 등골이란 곳에 묻혔는데 엄씨의 묘를 용궁묘라 하였다. 그러나 30여년전 강원탄광에서 석탄을 케기 위해 등골 지하로 굴진을 하기 때문에 용궁묘 부근의 지반이 내려앉아 버렸다.

  강원 탄광 측에서 이장공고를 하며 묘를 옮겨갈 것을 요구하여 후손들은 엄씨의 묘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엄씨네는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어 선산 하나 변변히 갖추지 못한 처지라 엄씨의 유골을 옮겨 갈 곳이 없었다. 그 때 엄씨의 후손들은 조상의 유골 하나 모실 땅 한뙈기 없음을 비관하며 이렇게 우리가 몰락하게 된 책임은 용국석을 훔 쳐간 조씨네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 동점에서 20리 거리에 있는 경북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 배지미 마을에는 장군대좌형의 명당이 있고 백병석(욕궁석)을 훔쳐간 엄종한의 사위인 조씨가 그곳에 묻혀있다. 그리고 조씨 무덤 아래로는 조씨의 후손들 무덤이 여럿 있어 매년 안동지방에서 조씨들이 모여와 시사를 지내는 곳이다. 엄씨의 유골을 옮길 곳이 마땅치 않아 고심하던 엄씨의 후손 들 가운데 과격한 사람이 있어 용궁 할아버지 (엄종한을 부르는 말)의 유골을 대현 리의 배지미 마을 조씨네 문중묘(장군대좌형국)윗쪽에 묻자고 제의했다.

  만약 조씨네 가 떠들면 용궁석을 내놓으라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말을 옳게 여겨 엄씨 의 후손들은 엄종한의 유골을 조씨네 문중묘가 있는 장군대좌형국의 제일 위쪽에 묻고 무덤을 만들었다.

  묘지기의 연락을 받은 조씨들이 몰려와 엄씨의 무덤을 파내려고 했다. 그러나 남의 무덤을 함부로 파낼 수는 없는 일이라 조씨네는 안동 법원에 고소를 하여 무덤을 옮겨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때 조씨 문중사람 수십명이 시사를 지내기 위해 왔다가 그 모양을 보고는 대경실색하여 어느 놈이 남의 문중묘 위에 겁도 없이 묘를 썼느냐고 소리쳤다. 묘지기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조씨 문중 젊은 사람들이 길길이 뛰며 당장 엄씨네를 찾아 요절을 내겠다고 험악하게 설쳤다.

  그때 문중의 나이 많은 노인이 나서서 젊은 이들을 달래며 천천히 말하기를
"그냥 놔둬라 필시 그 사람들이 여기 와 묘를 쓸 때에는 비장한 각오와 또한 옛날 일을 생각하여 용궁석을 찾겠다고 그런 모양이니 망할대로 망한 집안 사람들이니 섣불리 건들지 말아라.

  사실 따지고 보면 그분(엄종한)은 우리들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분으로 그분의 따님인 우리네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조상님들 묘 윗쪽에 모시기로 남도 아닌데 어떠냐." 하며 무마된 사실이 있다.

  지금도 엄종한의 무덤은 조씨네 문중묘 윗쪽에 있는데 이일은 지금부터 30여년 전 에 있었던 사실이다. 옛날엔 엄씨의 후손이 안동땅에 가면 조씨네가 후히 대접하였고 갈 때마다 쌀가마니를 말바리에 실려 보냈다고 한다.(출처 : 태백시청)


구문소와 비녀소의 효도왕자 전설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운곡동에 비녀소라는 깊은 소가 있는데 태백시의 동점동 구문소와 지하로 통해 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신라 선덕왕의 아들 효도왕자가 봉화군 재산면으로 유람 왔다가 백정의 딸인 월선이란 처녀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 서라벌에서 사신이 와 선덕왕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말을 전했다.  효도왕자는 월선에게 금비녀를 하나 건내주며 정표로 간직하라고 말한 뒤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하며 떠나갔다.  그 뒤 소식이 없어 애를 태우던 월선은 혹시 신분의 차이 때문에 왕자가 변심을 한 것은 아닐까 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이듬해 봄 서라벌의 효도왕자로부터 소식이 왔는데 오월 단오에 동점동에 있는 구문소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월선은 재산면에서 길을 떠나 구문소로 오다가 춘양면 의양리의 비녀소가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그곳에서 원선은 왕자가 사랑의 정표로 준 금비녀를 꺼내어 들고 만지며 왕자 생각을 하였다. 그때 갑자기 개천물이 소용돌이 치며 바람이 크게 불어서 월선은 그만 금비녀를 물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깊은 소에 빠진 금비녀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았다.  월선은 하는 수 없이 비녀를 찾지 못한재 구문소로 와서 효도왕자를 만나서 금비녀를 잃어버린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왕자는 정표로 준 물건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는 월선을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말없이 돌아서서 가버렸다.  놀라움과 슬픔을 이기지 못한 월선은 죽기로 결심하고 치마를 뒤집어 쓰고 구무소에 뛰어 들었다.  구문소 깊숙이 빠진 월선은 얼마후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모래밭 위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곳은 구무소 물밑으로 수중세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춘양 비녀소에서 잃어버린 금비녀가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월선의 지극한 사랑을 하늘이 감동하여 이러한 기적을 낳게 한 것이다. 월선은 금비녀를 건져 품에 품고 서라벌로 효도왕자를 찾아가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춘양의 비녀소는 월선이 금비녀를 빠뜨려서 비녀소인데 그곳과 구문소는 직선 거리로 50리정도 되는 거리인데 땅 속으로 통하여 있다고 한다.(출처 : 태백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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