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대구

모래 공양을 올린 아쇼카 왕

노촌魯村 2023. 2. 11. 21:55

비슬산 용연사 극락전 벽화

어느 날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와 함께 탁발하러 가시다가 길에서 소꿉장난을 하는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아이들은 모래와 흙으로 집을 만들고 또 신발에다 모래를 담아 밥이라고 얘기하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때 놀고 있던 아이들은 저 멀리 부처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을 떠 올렸습니다.

 

'부처님께 무엇이든지 공양을 올리면 큰 복을 받는다고 하던데 ....'​

이렇게 생각한 아이는 신발에 담아 놓은 모래 밥을 부처님께 바쳤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모래 밥을 받으시고는 빙그레 웃으시며 아난에게 건네 주셨습니다.

"아난아, 이 모래로 내 방의 허물진 곳에 바르도록 하여라."​

정사로 돌아 온 아난이 말씀대로 방의 허물어진 곳에 바르고 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모래라고는 하나, 어린 두 아이가 환희심으로 보시하였으니, 그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국왕이 되어 삼보를 받들고 여래를 위하여 팔만사천보탑을 세울 것이다."​

그러자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어찌 한 줌 흙의 공덕으로 그와 같이 큰 과보를 성취할 수 있습니까?"​

"과거에 한 국왕이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니 임금과 부하들이 모두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법을 청하여 들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왕은 마음의 문이 열리고 깨닫는 바가 참으로 많았다. 왕은 그 기쁜 마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부처님의 형상을 팔만사천장을 그려 보시하였으며, 그 공덕으로 장차 팔만사천의 탑을 건립할 수 있는 과보를 얻게 되었다. 그때 왕이 바로 오늘 모래를 공양한 소년이니, 다음 생에는 다시 국왕으로 태어나 그 탑을 세울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백여 년 후,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던 인도를 통일하고, 인도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다스린 국왕으로 기록된 아쇼카왕이 있습니다. 바로 아쇼카왕의 전생이 그 소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 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절실하게 깨달았고, 결국 큰 상처를 받은 백성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살피고자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하신 말씀대로 아쇼카왕은 천여 명의 승려로 하여금 경전을 편찬케 하는 결집을 주최했고, 인도 전역에 불탑을 건립하는 한편, 해외 여러 나라에 불교사절단을 파견했습니다.(출처 : 해인사 월간 해인 1984년 01월 23호)

대구 달성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 벽화

아소카(Ashoka, 아육왕, 阿育王, 무우왕, 無憂王, 산스크리트어: अशोकः 아쇼카)는 마우리아 제국의 제3대 삼라트(황제)이다.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함으로써 마우리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손자이며,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의 하나로서 전륜성왕(삼라트 차크라바르틴)으로 인용된다. 아소카는 수많은 군사 정복뒤에 오늘날의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아소카 시대 마우리아 제국은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서쪽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 동쪽으로는 인도의 아삼 주 남쪽으로는 미소레 주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전쟁의 비참함을 깊이 느껴 불교를 융성하게 하고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곳곳에 절을 세우고 불교를 정리하였으며, 실론·타이·버마에까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총애하는 왕비를 잃고 고독과 번민 속에서 죽었으며, 아라한의 자리에 올랐다.(출처 : 위키백과)

대구 달성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대구 달성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대구 달성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 비슬산용연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비슬산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는 천년 역사와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유서 깊은 천년고찰(千年古刹)로서 신라 신덕왕 1년(912년) 보양국사(寶讓國師)가 창건했으며, 이 절터는 용(龍)이 살았던 곳이라고 해서 절 이름을 용연사(龍淵寺)라 불린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3년(선조 36)에 휴정 사명대사(四溟大師)의 명령으로 인잠(印岑)· 탄옥(坦玉). 경천(敬天) 등이 재건했다. 1650년(효종 1)에 일어난 화재로 보광루만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으나 다음해에 계환(戒環)· 여휘(麗輝) 등이 중건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 영산전· 명부전· 삼성각· 안양루. 사명당. 선열당. 심검당. 유정당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금강계단(보물 제539호)이 있고, 1728년 세운 다포식 맞배지붕의 극락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과 극락전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813호), 묘법연화경 권4~7(보물 제961-3호) 이 외에도 3층 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과 14기의 부도 등이 있다.

  특히 용연사의 적멸보궁은 영남지방의 영험 기도처로 부처님의 훈훈한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성스러운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출처 : 용연사)                

  용연사龍淵寺 극락전極樂殿(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 비슬산 용연사는 통일신라 신덕왕 원년(912)에 보양국사가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 1년(1419)에 천일대사가 다시 지었고,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여러 해에 걸쳐 다시 지었다. 이렇게 지어진 건물은 200여 칸이 넘고 승려도 500여 명이나 되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영조 4년(1728)에 다시 지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지붕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