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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성주

성주세종대왕자태실(星州世宗大王子胎室)

노촌魯村 2010. 6. 16. 22:15

 

 

 

 성주세종대왕자태실(星州世宗大王子胎室.사적  제444호.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세종대왕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 아래 태봉(胎峰) 정상에 있으며,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1977년 태실에 대한 보수시 분청인화문대접·뚜껑, 평저호 및 지석(誌石)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자료)

 산천의 기운이 모인 풍수의 명당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 하여야만 길한 땅" -세종실록

"길지를 가려서 태를 잘 묻어

미리 목숨과 복을 기르게 하소서" -세종실록

신석사 맞은 편 세종대왕자태실 자리는 세종실록에 언급한 그 모습을 그대로 찍어낸 듯 오묘합니다

 

 

 

 세조대왕 태실(1438년 세종20 3월10일 장태) 

세조가 왕위에 등극한 뒤 예조판서 홍윤성이 세조의 태가 이곳에 묻혀 있음을 알리고 비를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비문이 지워져 알아 볼 수 없으며, 민담에 의하면 세조의 잘못을 미워한 백성들이 비석에 오물을 붓고 돌로 찧고 갈아서 거의 글자를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안평대군 태실(장태시기 미상 계유정난 후 파손) 

 임영대군 태실(1439년 세종21 5월 29일 장태) 

 광평대군 태실(1439년 세종21 5월 24일 장태) 

금성대군 장태시기 미상(세조 즉위 후 파손) 

 평원대군 태실(1439년 세종21 5월 26일 장태) 

 영응대군 태실(1439년 세종21 8월 8일 장태) 

 원손(단종) 태실 (1441년 세종23 윤 11월 26일 장태) 

 화의군 태실(장태시기 미상 세조 즉위 후 파손) 

 계양군 태실(1439년 세종21 5월 24일 장태) 

 의창군 태실(1438년 세종20 3월 11일 장태) 

 한남군 태실(1439년 세종21 5월 24일 장태) 

 밀성군 태실(1439년 세종21 8월 8일 장태) 

 수춘군 태실(1439년 세종21 8월 8일 장태) 

 익현군 태실(1439년 세종21 8월 8일 장태)     

 영풍군 태실(장태시기 미상 세조 즉위 후 파손) 

 영해군 태실(1439년 세종21 8월 8일 장태) 

 담양군 태실(1439년 세종21 5월 24일 장태) 

 왕자 당 태실(1442년 세종24 10월 23일 장태) 

서삼릉 태실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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